[태평로] 미·중 사이 '외교 줄타기' 유효기간이 끝나간다

조선일보
입력 2020.07.29 03:16

항행자유, 화웨이, 영사관… 미·중 "누구 편이냐" 선택 압박

임민혁 논설위원
임민혁 논설위원

이달 중순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가 외교부 고위 간부를 저녁 식사에 초청해 '항행의 자유 작전'(FONOP)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지 표명을 요청했다고 한다. FONOP는 미 군함을 남중국해에 진입시켜 이 지역이 모든 나라가 공통으로 쓸 수 있는 공해(公海)임을 강조하는 작전이다.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힘으로 억누르는 것이다.

미국의 FONOP 지지 요청은 그동안 사무관급에서 이뤄졌다. 그러던 것을 대사가 직접 팔 걷고 나선 건 우연이 아니다. '누구 편인지 확실히 하라'는 메시지다. 우리는 '항행 자유'라는 국제법상 원칙에는 원론적으로 찬성하면서도 이에 기반한 미군 작전에는 의도적으로 언급을 피해왔다. 대중(對中) 관계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재촉에 정부는 조만간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입장을 정리할 것이라고 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미 관리들을 만나면 "미·중 사이 선택을 강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한·미 동맹'과 '한·중 밀착'이 제로섬 관계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는 태평성대의 립서비스다. 지금은 중국이 대놓고 패권 야욕을 드러내고 미국은 이를 용납하지 않겠다며 사실상 전쟁을 선포한 상태다. 해리스의 압박 얼마 뒤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중국을 더 이상 정상국가로 대하지 않겠다"며 "중국 공산당을 바꾸기 위해 자유세계 국가들과 새로운 동맹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일환으로 미국은 전 세계를 향해 '누구와 함께할 거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항행자유작전, 화웨이, 휴스턴 중국 영사관 폐쇄 등은 겉으로 드러난 일각일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전략 차원인 '중국 때리기 쇼'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 재선 비상이 걸린 트럼프가 일부러 더 요란한 소음을 내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중국 압박은 트럼프의 개인 어젠다가 아니다. 미 의회는 올 들어 '대만' '티베트' '신장위구르' '홍콩' 관련 법을 줄줄이 만장일치에 가까운 표결로 통과시켜 대중 포위·봉쇄망을 법적으로 완성시켰다. 중국의 패권 도전, 인권 탄압, 사이버 해킹, 기술 도둑질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공감대가 초당적으로 형성돼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수십 년간 미 대중 정책의 근간이 됐던 가설, 즉 '미국이 중국 경제성장을 도우면 중국이 민주적이고 평화적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목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민주당 대선 승리 때 국무장관 1순위로 꼽히는 블링컨 전 국무부 부장관은 '트럼프 이상의 강력한 중국 압박'을 예고하고 있다.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 실현을 천명한 시진핑과 정면충돌은 불가피하다.

지금 모든 신호는 '선택의 순간'이 미 대선 결과와 무관하게 닥칠 것이라고 가리킨다.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싸늘한 현실이다. 특히 우리는 지정학적 입지 때문에 최전선에서 결단을 요구받을 가능성이 크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외교적 줄타기는 유효기간을 다했다. 트럼프 등장 이후 미국은 예전의 미국이 아니고 한·미 동맹이 만고불변의 진리도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은 일본·영국·프랑스·독일·호주 등과 한 팀을 이루고 있다. 중국 편에 선다는 것은 북한·이란·쿠바·파키스탄과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별 사안에서 유연성을 둘 수는 있겠지만 큰 틀에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 그런데 새 외교안보팀의 면면과 발언을 보면서 이 정권이 우리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겠다는 불안이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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