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나는 "1도 없다"에 분개한다

입력 2020.07.28 03:12

원선우 정치부 기자
원선우 정치부 기자
"그럴 가능성은 일(1)도 없습니다." 지난 23일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윤건영(초선·서울 구로을) 의원이 이 장관 아들의 스위스 학교 '특혜 입학' 의혹을 부인하며 이같이 말했다. 윤 의원은 이날 "1도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는 "(이 후보자가) 개입할 여지가 단 1도 없고" "부친이 정치인이라는 사실이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단 1도 없다" "대북 전단이야말로 한반도 평화에 단 1도 도움이 안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날 윤 의원의 발언은 국회 회의록에 빠짐없이 기록됐다.

'1도 없다'는 2014년 우리말에 서투른 캐나다 국적의 한 가수가 "하나도 모르겠다"는 말을 "1도 몰으겠다"고 쓴 데서 유래한 신조어다. 이후 한 걸그룹이 '1도 없어'라는 노래를 부른 뒤 대유행했다. 그러나 맞춤법상으로는 '하나도'를 '1도'로 바꿔 쓸 수 없다는 것이 국립국어원 공식 입장이다.

국립국어원은 "'하나'는 뒤에 오는 '없다' '않다' 따위의 부정어와 호응하여 '전혀' '조금도'의 뜻을 나타내는 명사"라며 "이는 숫자 1을 '하나' 또는 '일'로 읽는 것과는 개념이 다르므로 대체하긴 어렵다"고 했다. 국어사전도 명사(名詞) '하나'와 수사(數詞) '일(1)'을 엄연히 구별하고 있다. 학계에선 '1도 없다' 대유행 뒤 우리말의 기수(基數)와 서수(序數) 체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 의원의 '1도 없다' 발언이 마음에 걸린 또 다른 이유는 최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사흘 논쟁'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8월 17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자 언론은 8월 15~17일 '사흘 연휴'가 생겼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적잖은 사람이 "3일을 왜 사흘이라고 쓰느냐" "사흘은 4일이다" "수준 낮은 기자들이 한국어도 모른다"고 했다.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사흘'이 오르는 진풍경마저 벌어졌다.

윤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을 지냈다. 국정기획상황실은 나라 안팎에서 벌어지는 긴급 사안을 실시간으로 대통령에게 신속, 정확하게 보고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1보'가 잘못되면 대통령의 의사결정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최대한 정확한 용어를 사용해야 하고 편견·선입견에 따른 섣부른 분석이나 전망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윤 의원의 "1도 없다" 발언은 실망스러웠다.

윤 의원은 그날 청문회에서 '운동권 선배' 이인영 장관의 과거 주체사상 추종 전력이 논란이 되자 "천박한 사상 검증"이라며 "수많은 청년의 피와 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는 함부로 폄하할 대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 시절 학생운동가들의 고귀한 뜻은 잘 알겠다. 이젠 모국어의 품격(品格)도 지켜야 할 때가 아닐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