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성이 빚은 참극… '6층 사람들'은 왜 의전에 실패했나

조선일보
입력 2020.07.25 03:00 | 수정 2020.07.25 08:44

[아무튼, 주말]
성공한 의전 실패한 의전

2018년 초,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저지른 성폭력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할 때였다. 국회에서 일하는 여성 보좌진 사이에서 흉한 소문이 돌았다.

"나이깨나 잡수신 영감(국회의원)이 계셔. 그 의원실에 말단 여비서가 있었는데, 치마를 입고 출근할 때마다 그 영감이 '저기 쓸어라' '탁자 좀 닦으라'며 청소를 시키더래. 하도 이상해서 여비서가 치마 입었다 바지 입었다 하면서 며칠 동안 실험(?)을 해봤더니 딱 맞아떨어지더래. 그게 사람이 할 짓이야?"

사전은 '의전(儀典·protocol)'을 '정해진 방식에 따라 치르는 행사'로 정의한다. 의전이라고 하면 대통령이나 대기업 회장님처럼 높은 사람부터 떠오른다. 치러야 할 행사도 다양하고 장소와 상황에 따라 지켜야 할 격식도 많기 때문이다.

일러스트=안병현
일러스트=안병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은 한국 사회에 이런 질문을 던진다. 보스를 기분 좋게 한다면 만사 OK이고 옳은 의전일까, 얼굴을 붉히더라도 아닌 것은 'No'라고 말해야 성공한 의전일까. 국회 여성 비서관 A씨는 "지금 어떤 시대인데 비서들이 영감이나 시장 눈요기하라고 짧은 치마 입어가며 기쁨조 노릇까지 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반면 대기업 회장 의전을 맡았던 한 남성은 "모시는 분이 심기 불편하지 않게 하는 게 비서의 의무"라고 했다.

의전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직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부장 눈치를 살피고 불편한 자리에도 눈 질끈 감고 동행해야 한다. 일을 할 때 나오는 부산물처럼 자잘한 의전 행위를 우리는 매일 하고 있다. '의전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성공한 의전이란 무엇인가.

"폐쇄성 만들어낸 뒤틀린 의전"

박 전 시장의 전직 비서는 그의 속옷을 챙겼고 낮잠을 깨웠다. 이른바 '심기(心氣) 보좌'다. 피해자는 "셀카를 찍자며 신체를 접촉하거나 음란한 속옷 사진과 문자를 받는 등 성추행을 당했다"며 시장을 고소했다. 중견기업 비서 출신 박모(47)씨는 "은밀함이 만들어 낸 최악의 의전인 셈"이라고 했다.

비서 출신 인사들은 '폐쇄성'을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서울시 등에 따르면 박 전 시장 집무실은 대부분 굳게 닫혀 있었다.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구조였다고 한다. 내부에 샤워실과 침대가 있다는 사실도 이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제대로 알려졌다. 한 대기업 간부 비서 출신 J모씨는 "보는 눈이 없으면 몸과 마음이 흐트러질 수 있는데, 그럴 때 의전이라는 명목으로 독버섯 같은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고 말했다. 국회 여비서 출신 한 인사는 "여비서에게 속옷을 갖다 놓으라는 지시는 범죄와 다름없는데, 폐쇄성 때문에 의전으로 둔갑해 버렸다"고 비판했다.

'No'라고 제동을 걸 사람이 없는 환경이 그릇된 의전의 고속도로를 놓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중앙 부처 장관 비서관을 지낸 현직 고위 공무원 K씨는 "재야 변호사일 때와 달리 서울시장이 되고 나서는 정치적 동지가 아니라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모인 사람들, 영혼 없는 공무원들에게 둘러싸이다 보니 누구도 직언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서울시장은 서울시 공무원 1만7000여 명의 인사권을 가질 뿐만 아니라 부시장·비서실장·각종 특보 등 정무직 공무원 20여명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 또 연봉 1억원이 넘는 산하기관장 25명도 뜻대로 임명할 수 있다. K씨는 "자기 밥줄을 쥔 시장에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는 쓴소리를 하기 어려웠을 테고, 결국 심기 보좌가 성공한 의전이라는 잘못된 시그널을 줬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비서나 각종 특보를 임명하는 과정도 폐쇄적이었다. 피해자인 비서는 공무원 임용 전 실습 기간인 '시보' 신분일 때 이례적으로 박 시장 비서실에 발령 났다. 어떤 경로를 거쳐 발탁했는지 서울시는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피해자는 4년 넘게 서울시 관계자들에게 고충을 호소했지만 이른바 '6층(서울시청사 내 시장단 등 고위 간부가 있는 곳) 사람들'에게 묵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논란이 된 '젠더(gender)특보'는 박 전 시장의 성(性) 관련 정책·의정 활동을 보좌하는 자리다. 그런데 오히려 "실수하셨어요?"라고 물으며 시장의 성추행을 무마하는 방패 역할을 했다는 의혹까지 받는다.

회장님이 비서 찾으면 실패한 의전

'업무는 실패할 수 있지만, 의전은 실패하지 마라.'

의전의 중요성을 빗댄 말이다. 대기업 총수급 인사를 수행한 B씨는 "회장님이 공개된 장소에서 나를 찾으면 의전이 실패했다는 신호"라고 했다. 대기업 총수는 공개된 장소에서 의전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서를 찾는다는 것은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B씨는 "하루는 회장님이 조찬 행사에 참석했는데 사회자가 갑자기 회장님께 말씀을 부탁하는 바람에 비서진 모두 까무러칠 뻔했다"며 "그날 회장님 심기가 종일 불편해 다들 쩔쩔맸다"고 말했다.

한국에 있는 한 외국 대사관 의전 업무를 담당한 C씨에게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 입장식은 악몽으로 남아 있다. 당시 많은 나라 VIP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청와대 경호처 등이 입장 통로를 정리하는 과정에 혼선이 빚어졌다. C씨가 맡은 VIP 인사는 3분여 동안 입장문 앞에서 기다리다 입장했다. 의전 참패였다. C씨는 "주최 측 잘못이 명백했지만 이런 사태를 예상 못 한 내가 잘못을 죄다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고 시말서까지 썼다"고 했다.

비서만 2700여명이 일하는 국회에서는 '금배지(국회의원)' 심기를 보좌하느라 각종 진풍경이 펼쳐진다. 국회 보좌관이던 정모씨는 본회의를 마치고 국회 로텐더홀에서 빠져나오는 의원을 놓쳐 고참 보좌관에게 큰 질책을 들었다. 의원을 가장 빠른 동선으로 차량에 모셔 다음 행선지까지 가는 단순한 의전에 실패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정씨는 "그 후에는 내 영감님(국회의원)을 찾아내려고 다른 영감님 밀치고 몸싸움도 벌였다"고 말했다.

의전은 윗분을 잘 모시는 것 못지않게 윗분이 상대방에게 제대로 대우받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자리 배치, 연설 순서, 화환이 얼마나 잘 보이는지도 신경 쓴다.

최고의 의전은 '있는 듯 없는 듯'

평범한 직장인도, 아르바이트생도 일상에서 저마다 의전을 한다. 수도권에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하는 박모(41)씨는 "술자리에서는 상대방을 만취하게 하고 나는 정신 바짝 차리는 게 최고의 의전"이라고 말했다. 의전 대상은 신탁사 직원이다. 박씨보다 많게는 열 살이나 어리지만, 박씨가 건설비 등을 융통할 때 승인하는 권한을 가진 갑(甲)이기 때문이다. 박씨는 "그들의 호감을 사고, 기분 좋게 취하게 만들어 무사히 집에 보내면 성공한 의전"이라며 "대신 나는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긴장해야 하고,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대구의 한 공공기관에서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무기계약직 신분으로 전환된 이모(32)씨는 "잘 들어주고 맞장구쳐주는 게 내 경우엔 성공한 의전이었다"고 말했다. 대기업 사원 김모(40)씨는 "분위기에 어울리는 농담이나 건배사를 늘 머릿속에 여러 개 넣고 다닌다"고 했다. 신촌 편의점에서 일하는 한 대학생은 "아침에 편의점 주인의 기분을 살펴 적절하게 인사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과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올바른 의전이 무엇인지를 놓고 의견이 갈리기도 한다. 박 전 시장의 속옷을 여성 비서가 챙겼다는 보도가 나오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하지만 자신을 의사라고 밝힌 한 남성은 페이스북에 "비 오는 날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 옷이 모두 젖자 간호사들이 세탁해 퇴근할 때 개서 줬다"며 별 문제가 안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성(性)이 다른 상사의 속옷을 챙기도록 하는 것은 은밀한 일이고 권력 남용이며, 싫다는데 계속하게 시켰다면 심리적인 학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여성 의원을 보좌한 국회 여성 비서관 J씨는 "대부분의 업무는 남녀 보좌진 구분 없이 업무를 보좌하지만, 의원님의 옷 같은 개인적인 부분은 여성인 내가 챙긴다"며 "이른바 '펜스 룰'에 대한 논란이 있더라도 성별에 따라 논란이 제기될 수 있는 업무는 동성(同性)인 비서가 하는 게 옳다고 본다"고 말했다. 곽 교수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비서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성별에 따라 피해야 할 업무 영역을 사회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의전의 세계는 넓고 깊지만 의전의 최고봉도 존재한다. '있는 듯하면서도 없는 듯한 의전'이다. 10여년 동안 공공기관에서 의전만 했다는 이모(39)씨는 "의전이 없으면 당연히 문제겠지만 과하다고 느껴져도 나중에 말썽이 생길 수 있다"며 "의전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의전이 물 흐르듯 티가 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완벽을 지향하되 흔적이 드러나면 안 되는 일. 의전의 새로운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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