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그들은 마초 집단의 '꽃'이 되려는가

조선일보
입력 2020.07.16 03:16

朴 성추행 고소 침묵한 女의원들 "보호받고 싶었다"는 절규 외면

김윤덕 문화부장
김윤덕 문화부장

'맑은 분'이란 말은 여권이 고(故) 박원순 시장을 추모하는 대명사가 됐지만, 원조는 17대 총선을 앞둔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성 정치 원년을 만들자며 여성계가 똘똘 뭉쳐 만든 것이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였다. 이들은 '여성 100인 국회 보내기'란 타이틀을 걸고 부패한 기성 정치인들과 차별화한 '맑은' 여성 리더들을 발굴해 각 정당에 공천을 요청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박 전 시장도 추천 위원 중 한 사람이었다.

성과는 대단했다. 추천한 101명 중 46명이 17대 총선 출마를 확정 지었고, 16대의 두 배가 넘는 39명의 여성 의원이 탄생했다. 비례대표의 50%를 여성으로 공천하도록 선거법을 개정한 것도 17대부터 여성 의원이 급증한 이유다. 이후 여성들의 국회 진출이 본격화한다. 지난 4월 총선을 통해 21대 국회에 입성한 여성 의원이 57명. 헌정사상 첫 여성 부의장이 된 김상희를 비롯해 남인순, 정춘숙, 권인숙, 이재정, 진선미, 한정애 등 거대 여당의 여성 의원들이 사실상 그 수혜를 입고 금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여성 브랜드를 앞세워 국회에 입성한 이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참담하다. 2008년 호주제 폐지 이후 여성 의원들이 일궈낸 성취가 기억나지 않는다. 보육시설의 아동 학대가 이슈가 돼 어린이집에 CCTV를 설치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셀 때 한명숙, 김상희 등 다수 좌파 여성 의원들이 거대 이익집단이자 유권자인 어린이집 원장들 압력에 설치를 반대했던 것만 또렷하다.

이들은 그저 진영과 당의 논리에 충실했다. 탄핵 정국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섹스 비디오, 성형 시술 등 성적(性的) 비하와 가짜 뉴스로 초토화될 때 모른 체했고, 미투 정국에서 고은·이윤택 등 좌파 예술인들이 줄줄이 불려나왔을 때 머뭇거렸으며, 안희정·오거돈 등 여권 정치인들의 성범죄가 만천하에 드러났을 때조차 여론의 뭇매를 맞고서야 비판했다.

진짜 민낯은 이번 박 시장 성추행 고소 사건에서 드러냈다. 오거돈 때 "뼈를 깎는 심경으로 당내 성폭력 문제를 원천적으로 근절하겠다"던 남인순 최고위원을 비롯해 정춘숙·진선미 의원,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 등은 성추행 관련 질문에 침묵 혹은 "나는 모른다"로 일관했다. "여성을 팔아먹고 사는 여성들"이란 비난이 나오자 마지못해 입장문을 발표한 게 전부다.

여성운동을 아낌없이 지원했던 박 시장에 대한 연민을 탓하는 게 아니다. 여성을 차별하는 법과 제도를 철폐하려고 국회에 들어갔다면, 박 시장과의 인연 이전에 피해 여성의 편에 서서 진상을 규명하라 외쳤어야 한다. 그들에겐 "숨 쉬고 싶었다.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다"던 피해 여성의 절규가 들리지 않는가. 민주당의 집단적 2차 가해나 다름없는 '님의 뜻 기억하겠다'는 현수막이 서울 전역에 걸릴 때 그들은 무엇을 했나.

강남역 살인 사건, 전국을 뒤덮은 미투 열풍에도 대한민국 여성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체육계의 성폭행은 여전하고, 아동 포르노 범죄자를 석방하는 나라다. 여성은 여전히 밤길을 걷기 두렵고, 일과 양육을 병행하지 못해 사표를 쓴다. 이걸 바꿔달라고 국회로 보냈더니, 선거철 "여성을 30% 이상 공천하라" 요구할 때만 의기투합한다.

김상희 부의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만들어낸다"고 했다. 권인숙 의원은 "이번 기회에 더 많은 여성이 광역단체장으로 진출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여성 의원, 여성 장관의 숫자가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는 걸 현 정권 아래서 처절히 깨달았다. 한국 여성운동의 완벽한 퇴보다.

대체 그 '맑던' 여성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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