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曲判阿文

조선일보
입력 2020.07.15 03:16

대자보 유죄, 유재수 석방 등 '정치'에 오염된 사법부에서
정권 눈치 살펴 법을 비트는 '기교 사법' 판결이 속출한다

이명진 논설위원
이명진 논설위원
은수미 성남시장의 시장직을 유지하라는 대법원 판결이 논란을 낳고 있다. 대법원은 은 시장의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는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검사가 항소장을 부실하게 기재했다며 2심 당선무효형(벌금 300만원)을 파기했다. 절차적 문제로 본안을 뒤집은 흔치 않은 사례다. 대법원은 "검사 항소장에 구체적 항소 사유를 적게 돼 있는 형사소송 원칙을 확인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검찰 출신 변호사 얘기로는 '양형 부당' 네 글자만 적어도 넘어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유독 은 시장 사건에만 선택적으로 엄격한 법 잣대를 적용했다는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대법원에 근무한 분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실이라면 중대한 문제다.

'기교(技巧) 사법'이라는 말이 있다. 재판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법 기술을 부려 증거와 논리를 짜 맞춘다는 판사 사회 은어다. 억지로 꿰맞추다 보니 판결에 비상식적 논리가 동원되기도 한다. 과거 민노당 의원 '공중 부양' 사건에 무죄를 선고한 판사는 국회 사무총장실 탁자 위에서 활극을 벌인 의원이 '극도의 흥분 상태'였기 때문에 범죄 고의(故意)가 없다고 했다.

근래 있었던 법원 판결들을 보며 기교 사법을 다시 떠올렸다.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 너무 많다. 대표적 사례가 대학 구내에 대통령 비판 대자보를 붙인 청년에게 법원이 유죄를 선고한 일이다. 재판에선 경찰이 피해자로 지목한 대학교 직원이 "피해 본 적 없다"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증언했다. 청년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증거였다. 그런데 이 핵심 증언은 판결문에 나오지 않는다. 판사는 대신 "청년이 새벽에 대자보를 붙이려 건물에 들어오는 걸 미리 알았다면 불허했을 것이라고 피해자가 인정했다"고 적었다. '피해 본 적 없다'는 명확한 증언은 무시하고, 있지도 않은 상황을 가정한 유도 신문 내용을 끌어다 유죄 증거로 삼은 것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시계를 5공 시대로 되돌린 '억지 유죄'는 그렇게 나왔다.

다음은 '유재수 석방' 판결이다. 대통령을 형(兄)이라고 불렀다던 유씨는 공무원이 된 후 알게 된 업자 4명에게 먼저 요구해 뇌물 4200만원을 받았다. 강남 아파트를 사겠다고 2억5000만원을 무이자로 빌렸다가 '집값이 내렸다'며 일부 떼먹기도 했다. 형을 깎아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데, 희한한 감형 논리가 판결문에 등장한다. "유씨는 (업자들에게) 철마다 부친이 재배한 옥수수, 감자 등을 보내주었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 게 아니라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공직자와 업자의 부적절한 유착은 '친분'으로 둔갑했다. 앞으로 뇌물 공직자들의 '농작물 보내기'가 유행이 될지도 모르겠다. 재판에선 "친분 관계로 받았다"고 우길 것이다. 그때마다 집행유예로 풀어줄 건가.

공수처법 처리 과정의 상임위 강제 사보임을'합법'으로 판단한 헌법재판소 결정은 기교 사법의 극치라고 할 만하다. 대통령이 임명한 재판관들은 국회법이 '임시회 회기 중엔 (당사자 뜻에 반해) 사보임할 수 없다'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는데도 '위원이 선임된 회기와 동일한 회기 중에만 사보임 못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며 숫자로 밀어붙였다. 법 해석이 아니라 아예 새 법을 만드는 수준이었다. 오죽하면 반대 재판관들이 '국어학자에 물어보자'고 했겠나.

법조계에선 이런 상황을 빗대 '곡판아문(曲判阿文)'이란 신조어가 생겼다고 한다. 판사들이 판결을 굽혀 대통령에게 아부한다는 뜻이다. 법을 출세 수단이나 정치 도구로 여기는 사람들이 법복을 입고 판사 흉내를 내고 있다. 툭하면 법을 비틀고 법으로 장난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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