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백선엽은 '이순신'의 대한민국 버전이다

조선일보
  •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입력 2020.07.14 03:18

친일 굴레 논란, 팩트와 달라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언론인이었던 나는 2009년 10월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중앙일보 지면에 그 내용을 1년 2개월 동안 회고록 형태로 실었다. 이후 올해 초 병상에 눕기까지 그의 기억을 줄곧 들었다.

6·25 전쟁, 휴전 뒤 진행한 한국군 현대화의 험난한 여정에서 그가 쌓은 업적은 정말 대단했다. '이런 인물이 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으로 시작해 나는 관련 저서 8권을 냈다. 백 장군의 서거로 그의 전적과 업적이 잘 알려지고 있어 여기서는 더 적지 않는다.

인터뷰 전 그의 행적 중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만주군 경력, 특히 '간도 특설대'였다. 이 부분의 문제가 크다면 나는 회고록을 오롯이 집필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정말 간도 특설대라는 곳에서 독립군을 '잔인하게' 토벌했을까.

당시 만주에는 독립군, 나아가 항일 무장 세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곧 알았다. 193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만주는 일본의 강력한 관동군 통제 아래에 들어선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무장 항일은 거의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43년부터 해방 전까지 그는 그곳에서 일했다. 독립군은 눈에 띄지도 않았고, 그저 중국 공산당계 팔로군(八路軍)의 뒤를 쫓는 업무에 종사했다. 그마저도 팔로군을 찾을 수 없어 그가 속한 부대는 당시 베이징(北京) 인근 열하(熱河)까지 진출했다. 정보 수집과 대민 선무(宣撫)가 주된 작업이었다.

그러나 또 사람들은 묻는다. "왜 하필이면 일본군 앞잡이인 만주군에 투신했느냐"고. 그 점도 생각해봤다. 강점기 막바지 일본은 태평양 전쟁까지 꿈꾸면서 세계 최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일본을 향한 저항도 필요했지만, 그 속을 잘 살펴 저들의 힘을 제대로 알아가는 일도 중요했다.

1920년 출생한 그는 나라를 직접 일본에 빼앗긴 아버지 세대와는 달랐다. 일본어를 교과과정에서 익혔고, 일본의 실재하던 힘에 주목하면서 그 바탕을 탐구하여 내 힘으로 앉혀보려는 실사구시 정신이 컸다. 따라서 그의 만주군 경력 모두는 그렇듯 크게 지적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명분과 의리'를 들이대며 친일(親日)과 부역(附逆)의 굴레를 그에게 뒤집어씌운다면 당시 일본 통치하에 남아 수도·전기·토목·군사·산업 등 모든 영역에서 일본의 역량을 학습하며 제 가정을 이뤄 오늘의 대한민국 정체성을 이룬 대다수의 한국인을 모독하는 일이다.

말년의 백선엽은 외로웠다. 김일성 군대 및 중공군을 막아낸 군공(軍功)과 한미 동맹의 큰 초석을 다진 업적은 함께 싸웠던 미군만이 제대로 평가했고, 그가 지킨 땅 안의 한국인들 상당수는 역설적이게도 그를 '반(反)민족'으로 몰았으니 말이다.

정부의 결정에 따라 6·25 전쟁 전우 12만여 명이 묻힌 동작동에 그를 안장할 수 없다. 대신 그는 대전 현충원에 묻힌다. 그의 공적에 견주면 유감천만의 일이다. 아울러 전쟁을 회고하는 우리 사회의 수준에 큰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10여 년 동안 인터뷰하면서 나는 그에게서 '이순신'을 읽었다. 명분과 의리에만 집착하는 정치권과는 달리 실재하는 힘에 주목하면서 싸움터에 끝까지 남아 적을 상대했던 조선의 명장 말이다. 백선엽은 달리 말하자면, '보통명사 이순신'의 대한민국 버전이다.

북한의 위협, 한반도의 국제정치적 불안정성을 감안하면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이순신'이 필요하다. 착실하게 힘을 쌓아 나라와 민족의 안전과 번영을 이끄는 인재 말이다.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영전에서 이 점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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