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천재 시인은 왜 北에서 詩를 잃었나

입력 2020.07.03 03:16 | 수정 2020.07.03 14:53

토속적 시어 쓰던 백석·이용악, 월북 후 수령 찬양하거나 절필
"죽탕치자" "삶은 소대가리" 北은 시인이 살 수 없는 사회

이한수 문화부 차장
이한수 문화부 차장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엊그제 시집 다섯 권을 한꺼번에 냈다. 직접 쓴 시는 아니고, 죽은 시인 다섯의 시를 가려 뽑고 감상평을 달아 '머리맡에 두고 읽는 시'라는 제목을 붙였다. 김용택이 꼽은 다섯 시인은 김소월·이상·윤동주·백석·이용악. 앞의 셋은 해방 전 젊은 나이에 죽었고, 백석(1912~ 1996)과 이용악(1914~1971)은 살아서 광복을 맞았다.

둘은 공통점이 여럿이다. 일본 유학 다녀와 식민지 조선에서 기자로 일했다. 1936~1937년 비슷한 시기에 첫 시집을 냈다. 토속적이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벼리는 '천재 시인'으로 주목받았다. 월북했다는 이유로 한동안 금기였다가 민주화 이후인 1988년 해금됐다. 그러나 평안도 남자 백석과 함경도 사내 이용악에게 월북이란 단지 귀향(歸鄕)이었을 뿐이다.

더 큰 공통점이 있다. 둘 모두 북에서 시다운 시를 쓰지 못했다. 이용악이 북에서 쓴 시는 생경한 구호투성이다. "미제를 무찔러 살인귀를 무찔러/ 남으로 남으로 번개같이 내닫는/ 형제여 강철의 대오여/ 최후의 한 놈까지 원쑤의 가슴팍에/ 땅크를 굴리자"라거나 "어버이 수령께서/ 복구 현장을 또다시 다녀가신 감격으로 하여/ 우리의 가슴속은 진정할 수 없고//(중략)// 기어코 보답하자!/ 어버이 수령께 한결같이 바치는/ 우리의 붉은 충성을 천백 배로 불태워…"라고 썼다.

이용악은 원래 이따위 글을 쓰는 시인이 아니었다. 시인 김지하는 거의 30년 전 인사동 어느 술집에서 대취했을 때 매직펜을 들어 술집 벽면에 이용악의 '그리움'이란 시를 휘갈겨 썼다.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중략)//잉큿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김지하가 육필로 쓴 이용악의 시는 6년 전 벽면을 통째로 떼어내 경매에 부쳐졌다. 김용택은 "이용악만큼 우리 고유의 속 깊은 정을 드러내 준 시인도 드물다. 순하고 착한 말을 찾고 선한 말로 조용조용 시의 나라를 세웠다"고 평했다. 그러나 북에서 쓴 시에선 '순하고 착한 말'이나 '선한 말로 조용조용 세운 시의 나라'를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백석도 북에서 시를 쓰지 못했다. 양강도 삼수군 농장으로 쫓겨난 백석은 1962년 동시 '나루터'를 마지막으로 썼다. '원수님'을 찬양하는 시였다. "이때 원수님은 원쑤들에 대한 증오로/ 그 작으나 센 주먹 굳게 쥐여지시고/ 그 온 핏대 높게, 뜨겁게 뛰놀며/ 그 가슴속에서 터지듯 불끈/ 맹세 하나 솟아올랐단다―/ '빼앗긴 내 나라 다시 찾기 전에는/ 내 이 강을 다시 건너지 않으리라'". '사슴'처럼 향기로운 시를 쓰던 백석은 이후 죽을 때까지 30여년간 시를 쓰지 못했다.

김용택은 "백석의 시는 섬세한 미성이고 용악의 시는 육성에 가깝다. 용악의 시가 동편제면 백석의 시는 서편제"라고 평했다. 이런 평가는 해방 무렵까지로 한정해야 한다. 새 시집에도 당시까지 시만 실었다. 두 시인은 북에서 시를 잃어버렸다. 이유는 누구나 안다. 지금도 북에선 제대로 된 사회였다면 시인이 되었을 말의 전문가들이 백두혈통 명에 따라 "괴뢰패당을 죽탕쳐버리자"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 같은 표현을 찾아야 하니 사랑하는 이에게 들려줄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겠나.

며칠 전 공교롭게도 소설가 김연수가 백석이 북에서 겪었을 참담한 상황을 쓴 소설('일곱 해의 마지막')을 냈다. 소설에서 주인공 기행(백석의 본명)은 탄식한다. "전쟁이 끝나자 지옥보다 더 나쁜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은 지옥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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