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상실의 시대와 음악

조선일보
  •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입력 2020.06.30 03:00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세계대전의 충격은 20세기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 음악가들 역시 이 비극을 피해갈 수 없었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가 떠오른다. 처참히 무너진 건물 속, 독일 장교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유대계 피아니스트의 모습은 영화를 본 모두가 기억하는 장면이다.

세계대전은 20세기를 살고 있는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1891~1953)는 전쟁 소나타로 불리는 피아노 소나타 6·7·8번을 작곡했다. 2차 세계대전 중 작곡한 곡들이다. 전쟁 소나타를 관통하는 주제는 인간에 대한 공포, 전쟁 이후의 황폐함,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다.

작곡가 모리스 라벨(1875~1937)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운전병으로 입대했다. 전쟁의 참혹함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했다. 이후 라벨의 작품도 변했다. 어딘지 모를 허무함이 작품 곳곳에 드리워졌다. 라벨은 1차 세계대전 때 오른팔을 잃은 피아니스트를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공허함, 그리고 이를 이겨내려는 마음이 동시에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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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인류도 전쟁과 다름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총성은 없지만 전 세계가 바이러스와 분투 중이다. 일례로 미국 내 코로나 감염증 사망자는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미군의 숫자를 한참이나 넘어섰다. 이 비극을 겪은 이후 우리는 앞으로 '상실'이란 키워드를 떼놓을 수 없을 것이다. 21세기 음악가들에게도 상실의 시대는 마찬가지다.

라벨은 세계대전 직후 '라 발스'라는 작품을 완성했다. 빈의 왈츠를 예찬하며 만든 작품이다. 하지만 왈츠는 어딘가 부서져 있고, 선율은 완전하지 않다. 분위기도 스산하다. 그럼에도 라벨은 꿋꿋이 춤을 추는 사람들을 그린다. 간절한 그리움으로 작품에서나마 1855년 황실의 궁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다시는 오지 못할 그때. 그곳에선 사람들이 모여 왈츠를 추고 있다. 샹들리에의 불빛은 휘황찬란하며 꺼질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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