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이겼다고 절대 쓰지 마세요"

입력 2020.06.30 03:14

성호철 산업2부 차장
성호철 산업2부 차장

1년 전인 6월 30일 일요일, 산케이신문이 일본 정부가 한국에 반도체 핵심 소재 3종의 수출을 규제한다고 보도했다. 다음 날 오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구매팀은 곧바로 일본·대만 등지로 출발했고, 일본 정부는 산케이 보도와 똑같은 내용의 경제 보복을 발표했다. 우리 정부는 허둥댔다. 기업 임원을 불러 대책회의를 열었지만, 당시 한 참가자는 "놀란 우리는 일본 도발에 대한 정부의 대책과 설명을 기대했지만, 되레 정부는 '기업은 왜 진작 몰랐냐'고 타박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3개월, 일본 핵심 소재 없이 버틸 수 있는 기간이었다. 일본의 규제 시행일 직전까지 단 3일 동안 구매팀은 최대 물량을 확보했다. 미국·중국·대만에서 대체 수입선을 찾았고, 그래도 모자라자 제조 현장에선 '불화수소 아껴 쓰기'를 했다. 불순물을 제거하는 불화수소의 사용량을 줄이거나 순도가 낮은 걸 썼다.

대한민국 반도체는 버텼다. 일본 수출 규제에도 공장은 하루도 중단 없이 돌아갔다. SK머티리얼즈 등 소재업체는 연이어 국산화에 성공했다. 공급처를 잃은 일본 소재업체의 실적이 곤두박질쳤다. 일본 경제 보복을 맞받아친 한국 반도체의 승리 스토리다. '1대0'이다.

정작 '일본의 수출 규제 1년'을 취재할 때 승리 주인공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제발 한·일 경제전에서 완승했다고 쓰지 말아달라"고 읍소했다. 일본의 2차 경제 보복을 자극할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일본이 처음부터 반도체 공장 중단까지 노렸다고는 안 본다"는 게 반도체 업계 시각이다. 경고장이란 것이다. 예컨대 포토레지스트는 벨기에에서 가져왔는데 이곳은 일본 소재 회사의 현지 합작사다. 일본 정부는 추가 규제하지 않았다. 불화수소는 재고가 바닥날 때쯤 찔끔찔끔 허가했다. 반도체업체의 한 직원은 "반도체 공정에 들어가는 소재와 화학약품이 수백~수천종인데 이번에 전수조사해보니, 소량이지만 대체 불가능한 일본산 소재가 3종 말고도 적지 않았다"며 "일본 정부가 뻔히 알고도 이번엔 놔둔 것 아닐까 두렵다"고 했다.

일본이 다시 도발하면 한국 반도체는 또 생존을 걸고 싸우고 극복할 것이다. 하지만 왜 정치가 만든 한·일 갈등의 판에 반도체가 장기판의 말로 올라가야 하나. '2대0' '3대0' 하다가도 한 번만 삐끗하면 공장 중단을 각오해야 한다. 작년 7월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반도체에서 일본에서만 수입할 수 있는 소재·부품을 골라내고 보니, '롱 리스트'(긴 명단)가 나왔다"고 했다. 글로벌 경제 분업 체제하에서 그 '롱 리스트'를 모두 국산화할 순 없다.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모든 소재를 자급자족하는 건 '경제적 쇄국(鎖國)'일 뿐이다. 한 경제연구소 관계자는 "2차 도발 땐 링 위에 기업 말고 정치와 외교가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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