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슬기로운 취준생활

입력 2020.06.29 03:12

박상현 사회부 기자
박상현 사회부 기자

2004년 KBS(한국방송공사) 아나운서 직군 공채 경쟁률은 92대 1이었다. 1290명이 지원해 14명이 합격했다. 이 바늘구멍을 통과한 사람 중 하나가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전형 단계가 고차(高次)로 넘어갈수록 실력 차이는 간발이고 찰나로 당락이 결정된다. 떨어진 지원자는 속상하겠지만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기 때문에 결과에 대해 지원자들도 승복한다. 그 치열한 관문을 뚫고 얻은 공영방송 아나운서라는 직함은 그래서 값진 것이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의 보안검색 요원 정규직 전환과 관련해 공정성 논란이 불거지자 고 의원은 "능력과 의지가 있는 누구에게나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상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만약 그가 아나운서 시절, 정부가 나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0)' 방침에 따라 KBS 자회사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프리랜서 아나운서를 모두 KBS 본사 직고용 형태의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면 어땠을까. '상식'이라며 반겼을까.

이번 사태를 놓고 20~30대가 분노한 것은 정부의 치적(治績) 쌓기에 '공개경쟁채용'이라는 정당한 절차가 무시됐기 때문이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격상하는 '기적'을 목도하며 그들은 '문제(文帝) 폐하의 승은'이란 표현까지 썼다. 임금이 혀로 벼슬을 내리는 왕정시대와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이다.

정규직 전환 조건으로 공사 측이 출제하는 시험 문제가 '아이큐(IQ) 테스트' 수준인 것도 도마에 올랐다. 자기소개부터 필기시험, AI 면접, 영어면접, 심층면접, 신체검사까지 6단계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공채 지원자들은 허탈해했다. 민주당 김두관 의원은 "조금 더 배우고 필기시험 합격해서 정규직 됐다고 비정규직보다 2배가량 임금을 더 받는 것이 오히려 불공정"이라며 울화를 돋웠다.

미국 사회운동가 파커 J 파머는 저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정치라는 게 모든 사람을 위한 연민과 정의의 직물을 짜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버릴 때, 우리 가운데 가장 취약한 이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썼다. 정부가 선택적 선심을 베푼 결과는 인천공항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노노(勞勞) 갈등', 그리고 가장 취약한 처지에 있는 취업 준비생들의 비명과 한숨이었다.

올해 5월 인천공항 하계 인턴 모집에서 서류 탈락했다는 27세 연세대 졸업생은 "대통령이 사실상 비정규직 직원들을 공사에 꽂아줬다는 점에서 '낙하산'과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그럼에도 "가장 가고 싶은 직장은 여전히 인천공항공사"라면서 "아마도 내 토익 점수가 930점이라 떨어진 거 같으니 방학 동안 점수를 올려 다음 공채를 노려볼 것"이라고 말했다. 실력을 길러 다시 입사에 도전하겠다는 그 각오가 우리가 알던 정도(正道)이자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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