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의 pick] 옛 맛, 옛 가격 그대로··· 얼음가루 팥산을 한 삽 또 한 삽

조선일보
  • 정동현
입력 2020.06.27 03:00

[아무튼, 주말]

팥빙수
경기도 안양 '팥선생'

어머니는 늘 원가 계산에 충실했다. "집에서 해먹으면 되지!"라는 말로 외식 욕구를 단번에 끊어버렸다. 닭발, 족발, 감자탕 같은 요리가 1평도 안 되는 주방에서 완성됐다. 열풍이 부는 여름이면 '타다다닥' 소리가 들렸다. 기계로 얼음 가는 소리였다. 여름을 앞두고 어머니가 장만한 그 기계는 여름 내내 쉬는 날이 없었다. 그 기계를 옆에 두고 어머니는 팥을 뭉근한 불에 삶고 식혔다. 대접에 담긴 팥빙수를 퍼먹기 시작하면 귀가 먹먹해지고 머리는 띵해졌다. 일주일에 하루 쉬던 아버지가 집에 있으면 온 가족이 얼음 가루 산을 쌓아놓고 점심나절을 보냈다. 우리는 어리고 부모님은 젊던 시절이었다.

경기도 안양 ‘팥선생’의 팥빙수(앞)와 새알심팥죽.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경기도 안양 ‘팥선생’의 팥빙수(앞)와 새알심팥죽.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얼음을 갈고 그 위에 삶은 팥을 올린다는 간단한 공식으로 팥빙수를 만들던 때는 지났다. 반팔을 꺼내 입기 시작하면 5성급 호텔에서는 각종 열대과일이 올라간 몇 만원짜리 빙수를 메뉴에 올린다. 그마저도 예약하고 줄을 서야 간신히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이 몰린다. 서울 부암동 언덕배기에 있는 '부빙'도 뙤약볕에 사람들이 줄을 서는 곳 중 하나다. 절대적으로 싼값은 아니다. 그러나 요즘 커피 한 잔 값을 생각하면 납득이 갈 법도 하다. 빙수를 시켜놓고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이 적은 탓에 줄을 서도 꽤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곳 빙수는 토핑이 아니라 형형색색의 소스로 승부를 본다. 미숫가루 아닌 콩가루를 뿌린 기본 팥빙수, 거대한 바위산처럼 흑임자 소스를 뿌린 흑임자 빙수 등 옆자리에 나온 빙수를 힐끗거리다 보면 선택장애에 쉽게 빠져든다. 어차피 1인당 하나씩 시켜야 하는 빙수이니 이것저것 맛보다 보면 메뉴판을 한 바퀴 돌게 되는 게 이 집의 마력이다. 그럼에도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캐러멜 빙수가 맨 위에 있다. 소금을 솔솔 뿌려 캐러멜의 강력한 단맛에 포인트를 줬다. 입안은 서늘한데 그 속에서 달고 짠맛이 난투를 벌였다. 속에 파묻은 단팥에도 묵직한 한 방이 있어서, 높게 쌓인 빙수 한 그릇 비우는 것은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빙수 전문점이 아니라 제과점에서도 오래전부터 빙수를 팔아왔다. 대전을 지키고 있는 '성심당'의 빙수는 우유나 연유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대신 얼음에 손주걱으로 일일이 맛을 섞는다. 쌉싸름하고 청량한 차 향기가 느껴지는 '보문빙수'도 좋지만, 고소한 견과류의 맛이 주를 이루는 '논산빙수'가 이곳의 '원픽(최고)'이다. 유지방과 단맛이 적게 쓰여 느끼하거나 끈적거리지 않았다. 대신 고소한 견과와 한과, 떡이 맛과 식감에 재미를 주고 살짝 으깨가며 삶은 팥의 구수하고 푸근한 단맛이 충청도 사투리처럼 길고 유장하게 뒤를 이었다. 미숫가루를 일일이 주걱으로 얼음에 섞은 덕에 맛이 겉돌지 않았다. 팥빙수 한 그릇에 단팥빵을 크게 한 입 베어 무니 길게 한자리를 지킨 집의 저력을 가감 없이 느낄 수 있었다.

서울에 채 못 와 경기도 안양종합운동장 앞에서 길을 멈추면 '팥선생'이란 집이 나타난다. 이름에 근엄한 투가 묻어나지만 좁은 실내에 들어서니 어릴 적 머리를 쓰다듬던 담임선생님을 만난 것처럼 마음이 놓였다. 나이 든 부부는 하얀 새알을 빚고, 키가 큰 아들은 카운터에 서서 빙수와 팥죽을 담았다. 허리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 주문하고 값을 치렀다. 요즘 시세로 말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에 "어이쿠" 소리가 나왔다. 작은 그릇을 3000원에 파는 단팥죽에는 물김치까지 딸렸다.

국산 팥을 썼지만 역시 단돈 3000원인 팥빙수는 옛날부터 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우유와 연유가 이 집에서 직접 얼린 얼음 가루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단맛에 방점을 찍는 팥에는 떫거나 쓴 잡맛이 없었다. 한 숟가락 또 한 숟가락, 더운 여름 공기를 가로지르며 빙수 한 그릇을 비웠다. 팥에 얼음, 우유를 넣은 팥빙수. 별것 없다 싶지만, 가게 문을 나서는 순간 또 한 그릇이 고팠다. 돈으로 치를 수 없는 것들, 마음이 아니고서는 담을 수 없는 것들. 팥빙수에 씻겨 내려간 것은 더위만이 아니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