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느냐 사느냐… 부산 바다 등지고 붓을 드니 무엇을 외치랴"

조선일보
입력 2020.06.25 05:01

[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34] 포탄 뚫고 6·25 戰時판 발행

"우리의 수도 서울 방위를 최후까지 외치다가 불가부득(不可不得)한 작전상의 명령이라고 하여 지난 3일 그야말로 하는 수 없이 혀끝은 깨물고 발을 구르면서 피난민의 처절한 아우성 소리에 껴붙여서 한강을 건너지 않지 못했던 우리가 오늘 한반도의 동남단 부산의 일각에서 바다를 등지고 이 붓을 들게 되니 이제 다시 무엇을 외치랴."

1951년 2월 1일 자 조선일보 1면 사설 '죽느냐 사느냐―본보 속간에 제(際)하야'는 "우리는 죽을 것을 각오할 때 비로소 우리 앞에 활연할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4후퇴로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은 조선일보 사원들이 근 한 달 만에 다시 펴낸 타블로이드판 두 면짜리 신문은 조선일보가 6·25전쟁 중 펴낸 '제2차 전시판(戰時版)'의 첫 호였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1950년 6월 28일 피란길에 오른 조선일보 기자들은 대전과 대구에서 전시 호외를 찍었고,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본사로 돌아와 10월 23일 자로 '제1차 전시판'을 냈다. 유엔군의 북진과 중공군의 개입 등 급변하는 전황을 숨가쁘게 지면에 담던 조선일보는 중공군의 남진으로 두 달여 만에 다시 피란 보따리를 싸야 했다.

조선일보 제2차 전시판을 찍은 부산시 영도구의 한 인쇄소 단층 벽돌집. 가운데는 북한군에 납북된 할아버지 방응모를 대신해 전란 중 조선일보의 지휘봉을 잡은 방일영. 오른쪽은 제2차 전시판의 첫 호인 1951년 2월 1일 자 조선일보 1면.
조선일보 제2차 전시판을 찍은 부산시 영도구의 한 인쇄소 단층 벽돌집. 가운데는 북한군에 납북된 할아버지 방응모를 대신해 전란 중 조선일보의 지휘봉을 잡은 방일영. 오른쪽은 제2차 전시판의 첫 호인 1951년 2월 1일 자 조선일보 1면.

기자들은 부산 영도다리 옆에 정박한 피란민 철수선에서 합숙하며 신문을 만들었다. 남포동 창고에 조선일보 간판을 걸고 신문을 찍었다. 북한군에게 끌려간 할아버지 방응모를 대신해 회사 지휘봉을 잡은 맏손자 방일영이 27세 젊은 나이에 동분서주하면서 신문 발간 비용을 충당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비상시에 쓰라고 준 금비녀와 반지까지 팔았다.

다시 한 달 뒤인 1951년 3월 4일 서울을 재수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회사로 복귀한 사원들은 뒤엎어진 활자를 주워 모으고, 파손된 인쇄 시설을 정비했다. 그리고 1951년 4월 21일 자로 신문을 속간했다. '제3차 전시판'이었다. 하지만 4월 26일 자까지 내고 다시 중단됐다.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에 밀려 또 서울 철수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세 번째 피란길에 오른 조선일보 사원들은 인쇄기와 활자부터 트럭에 실었다. 목적지를 대전으로 잡았지만 수원에서 트럭이 고장 났다. 마침 전선이 소강 상태여서 수원에서 신문을 내기로 했다.

수원경찰서 앞 경기도 도립 병원 사택에 '조선일보사 수원 임시 발행소' 간판을 걸고 1951년 5월 3일 자로 '제4차 전시판'을 내기 시작했다. 기자들의 취재원 중 하나는 시장에서 구입한 헌 라디오. 당시 귀했던 라디오를 듣고 쓰는 뉴스는 'RP(Radio Press)통신' '알피통신'으로 표기했다. 기자가 최전선에 특파되거나 피란민 대열을 따라가 르포를 하기도 했다. 1951년 6월 2일 자부터 7월 7일 자까지 32회에 걸쳐 고아원에 수용된 아이들 이름과 나이, 살던 곳을 신문에 실었다. 언론이 펼친 최초의 이산가족 찾기 캠페인이었다. 그날그날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담은 조선일보는 인기를 끌어 발행 부수가 1만부를 넘어섰다.

1951년 8월 1일 자로 조선일보의 발행 주소가 '수원시'에서 '서울시 태평로1가 61'로 바뀌었다. 서울을 재탈환하고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본사로 복귀한 것이었다. 하루 앞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는 전란(戰亂)의 소용돌이에서 네 차례나 전시판을 발행하며 신문을 이어간 힘은 조선일보 기자들의 사명감과 열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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