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일의 입] 평양 대학생 부럽다, ‘표현의 자유’ 있어서

입력 2020.06.24 18:17 | 수정 2020.06.24 18:18


80년대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농담의 달인이었다. 두세 개 소개드린다. 공화당 후보 레이건은 민주당 후보 카터 대통령과 맞붙었는데 이렇게 말했다. "경제 불황이란 이웃이 실직자가 되는 것이다. 경제 공황이란 내가 실직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 회복이란 바로 카터 대통령이 실직자가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상황에서도 충분히 패러디를 할 수 있는 농담이다.

레이건은 소련 고르바초프와 여러 차례 정상회담을 했는데, 이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고르바초프가 말했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레이건은 죽일 놈이다’, 고함쳐도 경찰이 안 잡아갑니다." 레이건이 맞받았다. "아, 그렇군요. 미국도 마찬가지요. 워싱턴 광장에서 ‘레이건은 죽일 놈이다’ 해도 경찰은 본체만체 한다오." 레이건이 고르비를 한 방 먹인 농담이다. 소련 땅에서 미국 대통령을 욕하는 것보다 미국 땅에서 미국 대통령을 욕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것을 말해 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서울과 평양 상황으로 패러디하기가 묘하다. ‘죽일 놈’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서울과 평양에서 오늘 당장 ‘문재인·김정은은 민족의 영웅이다’ 라고 고함친다면 어떻게 될까. 어디에서 잡혀갈까.

레이건은 이런 말도 했다. "소련 헌법에는 발언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미국 헌법에는 발언 후의 자유와 집회 후의 자유가 있다." 이런 농담은 농담이 아니라 마치 지금 우리나라 상황을 걱정했던 것처럼 섬뜩하게 다가온다. 어제 대전 법원은 대통령을 비판한 대자보를 단국대 천안캠퍼스에 붙인 25살 청년에게 벌금 50만원 선고했다. ‘건조물 무단 침입’이라는 죄목을 붙였다. 오히려 학교 측은 "침입이 아니다, 피해도 없다,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는데도 법원은 유죄 판결을 내렸다. 대자보에는 시진핑 중국 주석 사진과 함께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나(시진핑)의 충견인 문재앙이 총선에서 승리한 후 미군을 철수시켜 완벽한 중국의 식민지가 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칠 것"이라고 돼 있었다. 패러디 형식으로 문 정부의 친중 노선을 비판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청년에게는 ‘발언 후의 자유’가 없는 셈이다. 지난 총선 전에는 평화로운 집회를 이끌었던 목회자 한 사람이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그에게는 ‘집회 후의 자유’가 없었던 셈이다.

어제는 대북 전단을 뿌린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와 관련된 여러 조치가 취해진 날이었다. 통일부는 그가 "허위사실로 남북간 긴장을 고조"한다고 했고, 이재명 경기지사는 탈북민 단체 4곳을 사기 및 자금 유용 등의 혐의로 수사 의뢰했다. 이재명 지사는 "이는(대북전단은) 진정한 반국가적 행위이기 때문에 불온 자금을 수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며칠 전 북한 노동신문에는 이런 보도가 있었다. 평양건축대학 대학생인 리혁송이란 자가 한 발언이다. "일단 전선 지역이 개방된다면 우리 청년 대학생들은 남 먼저 달려 나가 추악한 인간쓰레기들의 서식지인 남조선 땅에 속 시원히 삐라 벼락을 퍼부을 만단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대남 삐라 벼락을 뿌리겠다는 평양 대학생은 칭찬 받는데, 파주에서 대북 전단을 뿌린 박상학 대표 집 앞에는 지금 경찰들이 포진하고 있다.

통일부에게 묻는다. 탈북 단체가 ‘허위사실’을 퍼뜨린다고 했는데, 무엇이 허위사실인가. 북한을 3대 세습 왕조 체제라고 한 말이 허위사실인가, 대북 전단이 북한 땅으로 넘어갔다는 말이 허위사실인가. 이재명 지사에게도 묻는다. 탈북 단체의 대북 전단을 ‘반국가적 행위’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 사진에 담배꽁초 뿌린 평양 대학생의 대남 삐라는 애국적이란 뜻인가. 대남 삐라를 습득 신고하란 얘기를 들어야 할 경기 북부 주민들에게 이재명 지사는 대북 전단을 습득 신고하라며 코로나 경보에 쓰이는 재난 문자로 안내를 내보냈다. 우리는 뒤죽박죽 세상에 살고 있다.

오늘 새벽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총참모부가 제기했던 대남군사행동 보류했다는 속보가 떴다. "(김정은이 주재한)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조성된 최근 정세를 평가하고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당 중앙군사위원회에 제기한 대남 군사행동 계획들을 보류했다"고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앞서 북한 군 참모부는 금강산·개성공단·GP 등에 군부대 진주, 접경지역 군사훈련 재개, 대남전단 살포 지원 등을 예고했었다. 김정은 왜 이런 도발을 잠시 보류한다고 했을까. 그들이 다시 살펴봤다는 ‘최근 정세’란 무엇일까. 첫째 김정은·김여정 남매는 문재인 정부를 상대로 ‘굿 캅 배드 캅’ 놀이를 하고 있다. 여동생 김여정은 군사행동도 불사하겠다며 갖은 욕설을 퍼붓는 나쁜 경찰 역할을 맡고, 오빠 김정은은 뒤에서 이를 달래는 좋은 경찰관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 항공모함 3척이 제7함대로 집결하고 있는 것에 북한은 더럭 겁이 났을 수도 있다. 이미 일본 요코스카 항에 있는 레이건 항모, 그리고 필리핀 근해에 있는 루스벨트 항모, 니미츠 항모 등 미국 항공모함 3척이 한반도 근역으로 모여들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나쁜 경찰 김여정의 협박이 있고 난 뒤에 존 볼턴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이 공개됐다. 2018년 싱가포르 미·북 회담 때 ‘북한의 비핵화’와 ‘미국의 제재 해제’라는 핵심 현안을 놓고 청와대 안보실장 정의용이 상당 부분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다소 과장된 말 심부름을 하고 다녔을 가능성을 분석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본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회고록 중에 2017년12월 트럼프가 볼턴에게 "우리(미국)가 북한과 전쟁을 수행할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50대50?"라고 물었고, 볼턴은 "중국에 달렸다. 아마도 50대50?"이라고 대답했다는 대목을 듣고 충격에 빠졌을 수도 있다.

더욱이 평양 지도부가 모골이 송연할 회고록 부분은 이런 대목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나눈 대화다. "우리(미군)가 서울을 위협하는 북측 비무장지대의 포대를 겨냥해 대량의 재래식 폭탄을 어떻게 쓸 수 있을지, 또 그렇게 함으로써 사상자를 극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중국이 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왜 미국은 양자택일의 문제로 신속하게 접근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양자택일이란 북한의 핵무기를 그대로 놔두거나 아니면 군사력을 사용하거나 하는 문제다."

그래서 50대50이란 뜻이다. 김정은으로서는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미국의 군사 공격으로 김정은 일가와 평양 지도부가 궤멸될 수도 있었던 순간이 50%의 확률로 지나갔었다는 뜻이고, 그것은 6·25 때처럼 중국이 또 개입할 것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트럼프와 볼턴이 전쟁 불사 군사행동을 진지한 대화로 검토했다는 뜻이며, 이제 다시 미국 항공모함 3척이 한반도 작전 권역으로 집결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대남 군사행동은 너무 위험한 도박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또 김정은이 봤을 때 문재인 대통령이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일단 김연철 통일부 장관이 책임지고 사의를 표했고, 문 대통령이 사표를 수리했다. 형식적으로 김여정이 통일부 장관 목을 친 것이다. 게다가 문 대통령 얼굴에 담배꽁초를 뿌린 대남삐라 사진은 며칠째 계속된 신문방송을 통해 남한의 모든 국민이 다 봤다. 제주도 주민들까지 다 봤다. 그래서 대남삐라를 뿌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김정은은 유성옥 전 국정원 심리전 단장이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귀담아 들었을 수도 있다. 유성옥 단장은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수(手)를 잘못 뒀다. 이제 우리 정부가 대북 전단을 막을 명분이 없어졌다. 북한의 비대칭 무기가 핵과 화학무기라면, 우리가 가진 비대칭 무기는 자유 체제를 불어넣는 대북 심리전이었다. 우리로서는 전단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된 셈이다."

탈북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와 표현의 자유는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라 평양 대학생들이 지켜주고 있는 셈이다. 이런 아이러니 코미디는 처음 봤다. 물론 통일부와 경찰은 물론이고, 이재명 경기지사까지 대북 전단을 끝까지 막겠다고 벼르고 있지만, 김정은은 훨씬 더 영리하게 남쪽 국민들 분위기로는 대북 전단을 막을 명분이 없어졌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잊지 말아야 한다. 김정은은 대남군사행동을 ‘보류’시켰다고 했다. 보류란 언제든 다시 꺼내들 수 있다는 뜻이다.

*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이 단독으로 진행하는 유튜브 ‘김광일의 입’, 상단 화면을 눌러 감상하십시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