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語西話] 전쟁 영웅 사명대사의 歸去來辭

조선일보
  • 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20.06.12 03:12

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탑비 낙성식에 참석하고자 경남 합천 해인사 비림(碑林·부도와 비석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일을 주관한 제자는 스승의 고향인 전남 고흥의 돌로 승탑(부도)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수구초심(首丘初心·죽을 때 고향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뜻)의 승가적 수용이라 하겠다. 비문을 지은 전남 송광사 조계총림 방장 현봉 선사는 "수월(水月·물에 비친 달)처럼 오셨다가 운영(雲影·구름 그림자)처럼 사라져도 진흙 속에서 키운 하얀 연꽃의 향기는 남아 있다"고 고인을 찬(讚)했다.

해인사는 802년 신라 왕실에서 북궁(北宮·경주 북쪽 여름 별궁)으로 창건한 국영 사찰이다. 수많은 국사와 왕사를 배출했는데도 그 흔한(?) 신라·고려 시대의 화려한 승탑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임진란 이후 승려들의 소박한 부도들만 가야산 여기저기 흩어진 채 20기가량 전해온다.

그 가운데 호국 보훈의 달 6월에 참배가 가장 어울리는 곳은 전쟁 영웅 사명(四溟·1544~1610) 대사의 탑비라 하겠다. 임진란의 최고 공신이지만 종(鐘) 모양으로 아담하게 디자인된 부도에 이름조차 새기지 않았다. 그래서 '전(傳) 사명대사' 즉 사명대사 부도라고 전해온다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했다. 인과의 법칙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혹여 일어날 수 있는 반달리즘을 미리 경계한 것일까. 비석이 서있는 평지에서 20여m 떨어진 언덕 위 숲속에 숨듯이 앉아 있다. 덕분에 노출된 비석은 두 번에 걸친 반달리즘에 피해를 보았지만 부도는 별 탈이 없었다.

비문을 지은 이는 허균(許筠·1569~1618)이다. 명문가 출신이지만 광해군 때 역모 계획에 연루돼 참수를 당한 후 곳곳에 남아있던 그의 행적까지 지워진다. 사명대사비 저자 자격도 마찬가지다. 직위를 기록한 8자는 의도적으로 훼손당했다. 용케도 이름 두 자는 살아남았다. 1차 반달리즘이다. 1943년 일제강점기에는 합천 경찰서장 다케우라(竹浦)에게 네 조각으로 깨어지는 2차 반달리즘을 당한다. 다행히도 2년 만에 해방이 되었고 1958년 복원되었다.

[東語西話] 전쟁 영웅 사명대사의 歸去來辭
/일러스트=이철원
허균 집안은 아버지와 누이(허난설헌)까지 문장가 5명을 배출했다. 언젠가 허봉(許篈 ·허균의 형)과 사명이 긴 글 외우기 시합 끝에 대사가 이겼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고 마침내 사명은 허봉에게 당신의 모든 문서를 맡길 만큼 친한 사이로 발전했다. 어느 날 동생 허균을 서울 강남 봉은사로 데려와 대사에게 소개했다. 대사의 첫인상은 기골이 훤칠하고 얼굴은 엄숙하다고 허균은 기록했다. 3년 후 형은 세연을 다했고 그 역할은 동생이 떠맡았다. 전란 통에 허씨 집안에서 보관한 대사의 문서도 병화라는 반달리즘을 피해 가지 못했다. 승려 제자들이 보관했던 일부 자료를 모아 문집을 간행하면서 허균에게 서문을 의뢰한다. 두 사람은 형님 아우로 호칭하는 친한 사이로 누구보다도 스님을 잘 알고 있다(弟兄之交 知師最深)고 허균은 자부했다. 이런 인연 때문에 비문까지 짓게 된 것이다.

대사는 승려 모습보다는 늘 장군 역할이 더 부각되면서 이로 인한 내부적 힐난을 항상 감수하며 살아야 했다. 허균 역시 비문 말미에 "대사가 중생들로 하여금 혼돈의 세계인 차안(此岸)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으로 건네주는 일을 등한히 하고 구구하게 나라를 위하는 일에만 급급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는 일부 세평을 언급할 정도다. 뒷날 대사는 가야산으로 돌아오면서 그런 세간의 정서에 대해 귀거래사(歸去來辭)로 답변했다.

三日公行 不逆君命, 夜半歸山 不負師訓(삼일공행 불역군명, 야반귀산 불부사훈).

사흘 동안 영의정 벼슬살이 한 것은 임금의 명을 어길 수가 없는 까닭이요, 한밤중에 산으로 돌아온 것은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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