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이야기] 日 배려한 평화조약, 독도 분쟁 불씨 남겨

입력 2020.05.24 11:07 | 수정 2020.05.24 11:35

[이선민의 독도이야기]
[4] 샌프란시스코 평화회담과 독도 (상)
카이로 선언 정신 따른 '독도는 한국령' 규정
美 정치적 고려 끝에 조약문에 명시되지 않아

※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한편의 대하드라마와 같다. 수많은 집념어린 인물들이 등장하고, 여러 가지 쟁점을 놓고 격론과 공방이 오간다. 그리고 무대 위에는 주인공인 한·일 양국뿐 아니라 심판 격인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사회가 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본격화된 ‘독도 문제’의 역사와 현황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포함하여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매주 일요일 연재한다. /편집자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자리를 함께한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왼쪽부터). 세 사람은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장악한 모든 영토를 내놓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자리를 함께한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왼쪽부터). 세 사람은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장악한 모든 영토를 내놓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하지만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하려면 교전 당사국들 사이에 평화조약(Peace Treaty)이 체결돼야 했다. 연합국의 일본 점령 통치가 안정기에 접어든 1946년 미국에서 일본과 언제 평화조약을 체결할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국무부는 빨리 평화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국방부의 전신인 전쟁부는 일본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평화조약을 장기간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쿄의 맥아더는 군(軍)의 장기 점령이 가져올 부작용을 우려하여 국무부 입장을 지지했다. 결국 1946년 8월 국무부와 전쟁부가 합동으로 구성한 대일(對日)조약작업단이 출범했다.

◇첫 평화조약 초안, “일본은 독도 내놓아야” 명시

작업단이 대일 평화조약 초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핵심 사항의 하나는 일본의 영토 문제였다. 침략전쟁을 통해 광범위하게 확대된 일본의 지배 영역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이냐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한 것이었다. 일본은 당연히 이 문제에 전력을 투구하고 있었다. 중국·한국·소련 등 인접국들도 큰 관심을 갖고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와 관련, 대일조약작업단이 기본 지침으로 삼은 것은 ‘카이로 선언’과 ‘포트담 선언’의 영토 관련 조항이었다.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만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은 “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島嶼) 일체를 박탈한다. 만주, 대만 및 팽호도 등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훔친 모든 영토는 중화민국에 반환한다. 또 일본은 폭력(violence)과 탐욕(greed)으로 장악한 모든 다른 영토에서 쫓겨난다”고 선언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7월 역시 루스벨트·처칠·장개석이 발표한 포츠담 선언의 8항은 “카이로 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될 것이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홋카이도·큐슈·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라고 밝혔다.

1947년 1월 대일 평화조약 초안이 처음 만들어졌다. 영토 조항을 담은 제1장의 제1조는 “일본의 영토적 한계는 1894년 1월 1일에 존재했던 것으로 하며, 이하 조항들에서 설정되는 내용에 종속된다.”고 규정했다. 이는 카이로 선언에서 일본이 중국에 반환해야 하는 지역의 점령 기준일로 삼았던 청일전쟁을 다른 지역에도 적용한 것이었다. 일본이 1894년 이후 ‘폭력과 탐욕’으로 장악한 영토는 모두 내놓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어 제2조는 중국, 제3조는 소련에 양도될 지역을 밝혔고 제4조에서 한국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일본은 이에 한국과 제주도·거문도·울릉도·독도를 포함한 한국 근해의 모든 작은 섬들에 대한 권리(rights)와 권원(titles)을 포기한다.

이후 대일 평화조약 초안은 여러 번에 걸쳐 내부 검토와 수정을 거쳤다. 하지만 독도를 한국 영토에 포함시키는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미국의 대일 평화조약 조기 체결 방침은 다른 주요 연합국이었던 소련과 중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에 따라 대일조약작업단의 활동은 1948년 1월 중단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뒤로 중국과 북한 정권의 수립 등 동북아시아 정세가 급변하자 1949년 9월 미국은 영국 등 가까운 국가들의 협력을 받아 대일 평화조약을 다시 추진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대일조약작업단의 활동은 재개됐다.

1949년 11월 2일 드디어 대일 평화조약 안(案)이 완성됐다. 작업단과 국무부 차원을 넘어서 국방부와 연합국최고사령부(SCAP)에 송부된 첫 번째 문서였다. 대일 평화조약 초안의 독도 관련 부분은 1947년 1월 처음 작성된 이래 한 번도 변함이 없었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독도를 한국 영토로 명기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첨부된 지도에도 명시됐다.

1949년 11월 2일 미국 국무부가 국방부와 연합국최고사령부에 보낸 대일 평화조약 안에 첨부된 지도. 일본과 한국의 영토를 경계선과 경도-위도, 지명을 통해 분명하게 표시했다.
1949년 11월 2일 미국 국무부가 국방부와 연합국최고사령부에 보낸 대일 평화조약 안에 첨부된 지도. 일본과 한국의 영토를 경계선과 경도-위도, 지명을 통해 분명하게 표시했다.

1949년 11월 2일 완성된 대일 평화조약 안에 첨부된 지도에서 독도 관련 부분을 확대한 것. 한국 영토 경계선 안쪽에 울릉도와 독도의 명칭과 위치가 명기됐다.
1949년 11월 2일 완성된 대일 평화조약 안에 첨부된 지도에서 독도 관련 부분을 확대한 것. 한국 영토 경계선 안쪽에 울릉도와 독도의 명칭과 위치가 명기됐다.

◇시볼드 전문 뒤에 “독도는 일본 영토”로 바뀌어

그런데 연합국최고사령부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지난 번 글에도 썼듯이 주일미(美)정치고문 겸 SCAP 외교국장 월리엄 시볼드가 “리앙쿠르암(다케시마)에 대한 재고(再考)를 건의함.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되고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됨”이라는 답신을 보낸 것이다. 그는 11월 14일과 19일 두 차례나 국무부에 전문과 긴급문서를 보내 “독도를 일본 영토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자료도 제시돼 있지 않았지만 맥아더의 권위에 편승한 그의 문서는 효력을 발휘했다.

1949년 12월 29일 작업단이 다시 만든 평화조약 초안에는 독도가 일본 영토에 포함됐다. 또 소련과 영토 분쟁이 있는 북방 4개 섬 가운데 하보마이와 시코탄이 일본 영토로 규정됐다. 뿐만 아니라 일본 영토를 경계선을 그어서 표시하고 이를 지도로 첨부하는 방식도 사실상 사라졌다. 일본에 유리한 이 모든 변화가 시볼드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대일 평화조약 초안은 1950년 5월 존 포스터 덜레스가 대일평화조약 담당 미국 대통령특사로 임명되면서 완전히 틀을 달리하게 됐다. 덜레스는 대일 평화조약이 ‘징벌’이 아니라 ‘화해’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곧 이어 발발한 6·25전쟁은 일본의 전략적 위상을 높였다. 이에 따라 대일 평화조약은 최대한 일본을 배려해서 간단하게 만드는 쪽으로 방침이 선회했다. 영토 조항도 카이로·포츠담 선언의 정신에서 벗어나 일본 영토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기로 했다. 1950년 8월 7일 다시 만들어진 대일 평화조약 초안에는 일본 영토에 포함되거나 배제될 지역에 대한 언급이 모두 사라졌다.

◇연합국에 전달한 미국 초안은 영토 규정 없어

1951년 3월 27일 미국은 대일 평화조약 초안을 주요 연합국 14개국과 일본·한국에 전달했다. 미국이 다른 국가들에게 처음 공개한 평화조약 안(案)이었다. 이 초안의 한국 관련 부분에는 일본이 포기할 영토에 대한 아무런 규정이 없었다.

한편 영국과 호주·뉴질랜드·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들은 독자적으로 대일 평화조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1947년 8월(캔버라), 1950년 1월(콜롬보), 1951년 1월(런던) 등 세 차례에 걸쳐 회의를 가졌고, 영국을 중심으로 실무작업단을 구성해 평화조약안을 마련했다. 이들은 초안을 거듭 수정한 후 최종 평화조약 안을 1951년 4월 7일 영연방 8개국에 회람했다.

영연방의 대일 평화조약 안은 일본의 영토를 위도와 경도, 지명을 명기하여 경계선을 그어서 밝혔다. 한국과 관련해서는 제주도·울릉도·독도가 일본 영토에서 배제된다는 것을 명시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첨부된 지도에도 분명하게 표기됐다. 영연방은 미국과 달리 카이로·포츠담 선언의 정신을 충실하게 따랐던 것이다.

1951년 4월 7일 영국이 영연방 8개국에 통보한 대일 평화조약 안에 첨부된 지도. 일본의 영역을 위도와 경도, 지명을 명기하고 바다에 경계선을 그어서 명시했다.
1951년 4월 7일 영국이 영연방 8개국에 통보한 대일 평화조약 안에 첨부된 지도. 일본의 영역을 위도와 경도, 지명을 명기하고 바다에 경계선을 그어서 명시했다.

영국의 대일 평화조약 안에 첨부된 지도에서 울릉도와 독도 부분을 확대한 것. 일본 영토를 명시한 경계선의 밖에 있다.
영국의 대일 평화조약 안에 첨부된 지도에서 울릉도와 독도 부분을 확대한 것. 일본 영토를 명시한 경계선의 밖에 있다.

미국과 영국은 대일 평화조약의 최종안을 놓고 협의에 들어갔다. 그 결과 양국은 영토 문제에 대해 경계선을 긋지 않는 대신 구체적인 지명을 열거하기로 합의했다. 이처럼 영토를 예시하는 방식은 국가 간의 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많았다. 그래서 이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뉴질랜드는 영연방 초안처럼 위도와 경도로 정확히 경계선을 긋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 주위로 연속선을 그어 일본을 울타리로 감싸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본인에게 심리적 불이익을 준다”며 응하지 않았다.

◇영·미 합동초안, 한국 영토로 제주도·거문도·울릉도 예시

1951년 5월 3일 작성된 영·미 합동초안은 한국과 관련, “일본은 한국(제주도·거문도·울릉도를 포함한)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청구권을 포기한다”고 규정했다. 그동안 줄곧 한국 영토로 언급되던 독도가 빠진 것이다. 이는 호시탐탐 독도를 노리고 있는 일본에 영토 분쟁을 제기할 불씨를 남겨준 것이었다. 실제로 이후 한·일간의 독도 분쟁에서 이 조항의 해석은 첨예한 쟁점의 하나가 됐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대일 평화조약 안은 이후 부분적인 수정을 거쳐 최종 확정됐고, 1951년 9월 4~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평화회의에 제출됐다. 이 회의에는 대일 교전국 가운데 중국과 인도 등을 제외한 52개국이 참석했고, 소련·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를 뺀 49개국 대표들이 조약문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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