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달랑 3개 달려...나주 배가 울고 있다

입력 2020.05.23 14:02

배 주산지 나주 과수원 냉해 직격탄
나주시 "피해율 70% 이상" 집계
열매 10개 중 7개 열리지 않아
-7.5도 노출 거창 사과 피해 커

지난 20일 전남 나주 봉황면 철천리에서 정형기씨가 배나무를 살피고 있다. 달려 있는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조홍복 기자
지난 20일 전남 나주 봉황면 철천리에서 정형기씨가 배나무를 살피고 있다. 달려 있는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조홍복 기자
“열매가 아예 없어부러. 전멸이란게.”

전남 나주 봉황면 철천리에서 40년간 배 농사를 짓는 정형기(63)씨는 지난 20일 “이맘때 열매솎기로 여럿 인부를 고용했는데 올해는 아내와 단둘이서 일을 한다”며 “열매가 많이 달려야 솎는 작업을 할 텐데 그럴 만큼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지독한 냉해를 처음 겪는다”며 “올해 배 농사는 포기했다”고 했다.

장롱 깊숙이 두툼한 겨울옷을 보관할 무렵인 지난달 4~9일 냉해가 전국의 농촌을 덮쳤다. 최저 기온이 영하 1도에서 영하 7.5도까지 떨어졌다. 당시 영하 4도의 동장군이 기세를 떨친 나주가 큰 피해를 입었다. 2018년부터 3년 연속 발생한 냉해 피해 중 가장 혹독했다.

한달 반 전 냉해는 여름 문턱에서 ‘열매 없음’이란 청구서를 내밀었다. 피해 당시 꽃이 핀 배·사과 나무가 직격탄을 맞았고, 이달 중순 들어 우려했던 ‘열매 달리지 않은 나무’가 맨눈으로 확인되고 있다. 전국 배 생산량의 25%를 차지하는 나주와 사과 주산지 경남 거창 등에서 “저온 피해로 올해 농사 망쳤다”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지름 3cm크기로 자란 배 열매./조홍복 기자
지름 3cm크기로 자란 배 열매./조홍복 기자
22일 농림축산식품부가 잠정 집계한 지난 4월 말 기준 전국 저온피해 농작물 현황을 보면, 전체 피해 면적은 여의도(290㏊)보다 49배 넓은 1만4217㏊에 달했다. 배, 사과 피해가 가장 심각했다. 배 5066㏊, 사과 4445㏊, 복숭아 1298㏊ 순이었다. 특히 배의 경우 전체 재배 면적(9615㏊)의 절반이 넘는 과수원이 냉해 피해를 봤다. 사과도 당초 1936㏊(지난달 14일 기준)에서 4445㏊로 2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나주 배 냉해 피해율은 70% 이상으로 잠정 집계됐다. 착과 예상 열매 10개 중 7개가 열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주 배 냉해 피해율은 2018년 52.4%, 2019년 43.3%였다. 올해는 2192개 농가 중 1716개(78%)가 심각한 저온 피해를 입었다. 나주시는 “150일 자란 배를 수확하는 9월에 배 공급량이 떨어질 것이 명약관화라 가격 폭등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4월초, 하얗게 개화한 배꽃이 추위에 얼어 죽었다. 배가 냉해를 버티는 4월 최저 온도는 영하 2.8도다. 영하 1.2도나 더 기온이 떨어지자 착과(着果)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개화기에 불쑥 나타난 영하의 날씨에 꽃이 고사해 열매를 맺는 비율인 결실률(結實率)이 크게 떨어졌다.

배나 사과 등의 과실나무는 요즘 열매를 솎는 적과(摘果)를 거의 끝내야 한다. 본지가 정씨의 2만3140㎡(약 7000평) 배 과수원을 확인할 결과 나무 한 그루에 지름 3㎝짜리 열매가 200개씩 매달리는데, 실제로는 3~4개에 불과했다. 열매 솎는 작업이 필요 없는 정도로 착과율이 크게 떨어진 것이다.
지난 20일 전남 나주 봉황면 철천리 과수원에서 배 나무를 살피는 정형기씨./조홍복 기자
지난 20일 전남 나주 봉황면 철천리 과수원에서 배 나무를 살피는 정형기씨./조홍복 기자
국내 대표 사과산지 경남 거창군 사과농가도 역대 최대 냉해피해로 울상을 짓는다. 거창은 지난달 8일 기온이 영하 7.5도까지 내려갔다. 사과꽃이 얼어붙었다.

거창군 고재면 봉계리 사과농가 육철수(59)씨는 “20년 사과 농사에서 가장 심한 동해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해발 600m이상 고랭지가 많은 고재면 일대는 기온이 낮아 피해가 더 심각했다. 육씨는 “꽃에서 메추리알 만한 사과열매가 열려야 하는데 어쩌다 맺힌 건 성냥개비만 하고, 아예 쏙 빠진 것이 많다”며 “3년째 냉해 피해가 이어지니 밭을 다 갈아엎고 보상이나 제대로 받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그는 6000여평 사과밭에 홍로·부사 2000그루를 키운다. 육씨는 “사과나무 10그루 중 7그루는 냉해 피해를 봤다”며 “곧 3일간 하루 10명씩 사과꽃을 따는 인부들도 써야한다. 올해는 인건비, 농약값도 못 건질 상황”이라고 했다. 거창군 거창읍 장팔리 평지에서 사과농사를 짓는 이모(여·50)씨는 “냉해로 평년보다 꽃이 덜 수정돼 속상하다”고 했다.

거창 사과 냉해 피해 면적은 전체 1854㏊ 중 63%인 1176㏊에 달한다. 거창군은 “상품성 있는 꽃은 다 죽고 곁가지에서 겨우 사과가 맺혀 볼품도 없고 맛이 떨어질 것”이라며 “농민들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다. 국내 최대 사과 산지인 경북 청송, 영주, 안동, 의성 역시 냉해 피해로 몸살을 앓고 있다.

냉해에 이어 곧 폭염과 폭우가 기다리고 있다. ‘삼재(3災)’다. 농·수·축산물 가격이 치솟을 수밖에 없다. 실제 2018년의 경우 봄철 이상 저온에 이어 과일 껍질이 타들어가는 불볕더위, 태풍, 폭우가 잇따라 농촌을 할퀴었다.
가끔 보이는 배 열매./조홍복 기자
가끔 보이는 배 열매./조홍복 기자
전남도는 “기후재앙이 농촌에서 반복된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를 대비해 농민들은 농작물재해보험에 가입해 최소한 생산비는 건지려고 한다. 하지만 올해 피해 보상률이 기존 80%에서 50%로 줄었다. 그나마 보상기준이 사과와 배 열매가 얼마나 맺었느냐는 착과율이다 보니 실제 냉해 피해를 입고 질 나쁜 사과와 배가 열리기만 하면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이 달려 있어도 피해 산정에 빠지는 문제점도 있다.

거창군 고재면 봉계리 육철수씨는 “내년 농사를 지으려면 상태가 안 좋아 못 쓰는 사과라도 남겨 놔야 하지만 거기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으니 보상받자고 따낼 수도 없고 답답하다”고 했다. 일부 보상을 받더라도 본인보험부담금 20%를 부담하면 실제 보험으로 받는 보상액은 거의 없다고 했다.

농식품부 재해보험정책과는 “지자체별로 정밀 냉해 피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어 이달 말에야 최종 피해 규모 파악이 가능하다”며 “내달부터 신속하게 재해복구비를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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