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막내 재학아, 5월이면 사무치게 보고 싶구나"

입력 2020.05.23 11:55

5·18소설 '소년이 온다' 주인공의 실제 부모
문건양·김길자씨 "아들 누명 벗기려 40년 투쟁"
본지, 5·18 40주년 맞아 광주서 부부 인터뷰
"눈물이 나도 '소년이 온다' 소설 읽어 볼라요"

김길자 어머니./조홍복 기자
김길자 어머니./조홍복 기자
“여기 보시오, 집에서 이대로 입고 나갔는디, 하얀 양말도 신고….”

노모는 사진 속 소년을 어루만졌다. 소년은 개구리 무늬 교련복 하의를 입고 두 팔을 벌린 채 쓰러져 있었다. 눈을 감은 주검의 모습이었다. 하얀 양말이 도드라졌다. 왼쪽 뺨에 주르륵 흐르다 마른 피가 선명하게 보였다. “얘가 재학이어라.”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2014년 5월 발행된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가 역주행하며 주요 온라인 서점 베스트셀러 1·2위에 올랐다. 20~30대 젊은 독자층이 이 책을 특히 많이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8일에는 정세균 국무총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고 썼다.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를 인용한 것이다.
문건양 아버지./조홍복 기자
문건양 아버지./조홍복 기자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은 5·18 당시 숨진 중학생 동호다. 실제 모델은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최후까지 시민군으로서 계엄군과 맞서 항쟁하다 숨진 문재학씨(묘지번호 2-34)다. 당시 광주상고 1학년생으로 16세의 나이였다. 1964년생이니 생존했다면 올해 56세다.

본지는 지난 22일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한 주택에서 문건양(83)·김길자(80)씨 부부를 만났다. 고(故) 문재학씨의 부모다. 40년간 살던 광주 중흥동 집에서 2년 전에 이사왔다고 한다. 집에서 바로 앞에 5·18민주화운동이 시작한 전남대학교 정문이 있다. 부부는 “그날 이후 가슴에서 계속 피가 흐른다”고 했다. 김씨는 “전두환이는 금쪽같은 내 새끼를 폭도라고 했다”며 “그 누명을 벗겨주려고 40년간 앞만 보고 살아온 인생”이라고 했다.

김씨는 막내아들의 주검 사진을 꺼냈다. “5·18 3~4년 이후 가톨릭센터에서 사진전을 했는데 큰아들이 ‘재학이가 사진에 있다’고 합디다. 이 사진이어라. 5월이면 꺼내서 보지라. 보고 잡은 게.”

노부부는 2남 1녀를 뒀다. 문재학씨가 막내다. 어머니는 “막내라 더 애착이 갔다”며 “5·18 이후에 망월동에서 시신을 확인할 때도 재학이가 아니기를 바랐다. 너무 부패해 얼굴을 보고도 신원 확인이 어려웠다. 혹시라도 어디라도 살아 있기를 바랐다”고 했다.
김길자 어머니가 아들의 주검 사진을 만지고 있다./조홍복 기자
김길자 어머니가 아들의 주검 사진을 만지고 있다./조홍복 기자
이어 “학교 선생님이 교무 수첩 작은 사진하고 시체 사진을 비교했더니 ‘재학이가 맞다’고 했다. 1980년 6월 10일까지도 이렇게 수소문하고 다녔다”며 “검사한테 달려가 확인하니까 재학이 죽은 사진을 보여줬다. 바로 이 사진”이라고 했다. 김씨는 “집에서 나갈 때 옷을 그대로 입고, 양말도 신고, 그래서 그때 죽었다 생각했지만 문을 못 닫았다”며 “10월이면 썰렁하니 추운데도 내가 문을 못 닫고 살았다. 문 닫으면 영영 아들이 못 돌아올까 싶어서…”라고 했다.

소설 속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이.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 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

네가 여섯살, 일곱살 묵었을 적에, 한시도 가만히 안 있을 적에, 느이 형들이 다 학교 가버리먼 너는 심심해서 어쩔 줄을 몰랐제.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느이 아부지가 있는 가게까지 날마다 천변 길로 걸어갔제.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김길자 어머니가 아들의 사진을 어루만지고 있다./KBS
김길자 어머니가 아들의 사진을 어루만지고 있다./KBS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 숱이 적고 가늘디가는 머리카락 속까지 땀이 나서 반짝반짝함스로. 아픈 것맨이로 쌕쌕 숨을 몰아쉼스로. 엄마, 저쩍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노부부는 40년 전 5·18 당시를 회상했다. 막내아들은 23일부터 시민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했다. 도청 안에서 사상자들을 돌보고 유족들을 안내하는 일을 하느라 그때 이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25일 도청으로 갔다. “너, 계엄군이 또 들어온단다. 긍게 인자 집에 가자.” “엄마 아무래도 창근이(초등학교 동창)가 죽은 것 같아요. 긍게 창근이 생각해서 라도 여기서 조금만 더 심부름하다가 갈게.” “그러다 너 죽으믄 어찔라고 그러냐?” “안 죽어. 군인들이 들어오면 손들고 항복하면 되지. 긍게 걱정 말고 빨리 집에 가요.”

26일 다시 도청에 갔으나 아들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27일 새벽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다. 군인들이 시커멓게 도청으로 몰려갔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도청으로 갔다. 시신과 부상자들은 이미 계엄군의 손에 의해 상무대로 사라진 뒤였다. 며칠 뒤 담임교사의 연락이 왔다. “신문에 난 사망자 명단에 재학이 이름이 있다. 교련복을 걸치고 있다”는 말이었다. 부모 허락도 없이 시신을 가매장한 망월동 묘를 파서 시신을 눈으로 확인했으나, 이미 부패가 심해 얼굴 확인이 어려웠다. 검찰청과 계엄사에서 당시 찍은 사진을 확인하니 망월동에 누워 있던 썩어가는 시신은 아들이 분명했다.

부부는 이후 아스팔트에서 투쟁을 이어갔다. 전두환 정부는 유족들을 회유하고 협박했다. 전두환이 광주에 오는 날에는 전경들이 집 앞을 지키고 형사들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봉고차에 실려 제주도, 강원도까지 끌려 다녔다. 어머니는 “서울, 부산 빼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강제로 끌려 다녔다. 대통령 앞에서 시위할까 봐 우리를 다른 지역에 떨어뜨렸다”고 했다.
김길자 어머니가 아들의 주검 사진을 만지고 있다./KBS
김길자 어머니가 아들의 주검 사진을 만지고 있다./KBS
“나는 광주에서 왔는디라. 80년도 5월에 전두환이가 내 자식을 죽여부렀어라. 군인들이 총을 쏴서 죽어부렀는디, 광주에 전두환이 내려온다고 우리가 행패부린다고 나를 여기까징 데리고 왔단말이요.” 제주도에서 이렇게 외쳤지만, 사람들은 부부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어머니는 경찰이 휘두른 무전기에 머리를 맞고 다섯 바늘이나 꿰맸다. 시위하던 아버지는 경찰의 구타로 팔이 비틀려 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경찰은 “당신 자식은 폭도야. 폭도 부모가 무슨 할 말이 있어?”라고 가슴에 대못을 박기도 했다. 그렇게 한 맺힌 80년대를 보냈다.

1997년 5·18 신묘역이 완성돼 이장하는 날이었다. 아들의 뼈를 골랐다.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아들 얼굴의 뼈는 코 아래쪽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생전 재학이 얼굴을 다시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어 ‘재학아’ ‘재학아’ 이렇게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며 “흩어진 뼈를 쓰다듬어도 재학이는 없었다”고 했다. 부부는 유골을 가슴에 품고 목놓아 울었다.

‘소년이 온다’를 읽어봤느냐는 질문에 김길자씨는 “아직”이라며 “딸한테 오늘 사달라고 부탁하겠다”고 했다. “아들 이야긴디, 눈물이 나도 내가 읽어 볼라요.”
5.18 소설 '소년이 온다' 표지./조홍복 기자
5.18 소설 '소년이 온다' 표지./조홍복 기자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