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정의도 사랑이 없으면

조선일보
입력 2020.05.23 03:00

이한수 Books팀장
이한수 Books팀장
무슨 말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오래전 머릿속에 넣어뒀던 문장의 뜻이 갑자기 이해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돈오(頓悟)'의 순간이라 할까요.

마감이라는 불이 발등에 떨어져 눈썹까지 태우려고 할 무렵이었습니다. 큰일 났다, 식은땀 흘리다가 이런저런 신간을 뒤적이는데 문득 '돈오'가 찾아왔습니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김수영의 시 '사랑의 변주곡' 첫 문장입니다. 머릿속에 들어있는지조차 모른 채 한구석에 누워 있던 이 문장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이런 뜻이다' 하고 깨달음을 주더군요.

미국 심리학자 잭 콘필드가 쓴 '마음이 아플 땐 불교 심리학'(불광출판사)을 일별하다가 벌어진 일입니다. 콘필드는 불교 심리학의 원리를 스물여섯 가지로 설명하는데 그중 열셋째 원리에 이렇게 썼습니다.

"욕망에는 건강한 욕망과 건강하지 못한 욕망이 있다. 둘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욕망의 한가운데서 자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군요. 욕망에는 미움의 욕망과 사랑의 욕망이 있군요. 김수영이 '욕망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고 선언한 뜻은 건강하지 못한 미움의 욕망이 아니라 건강한 사랑의 욕망을 가질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었군요.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어긋나지 않았다는 공자의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와도 통합니다.

"금가루가 아무리 귀해도 당신의 눈에 앉으면 시야를 흐린다"네요. 정의(正義) 속에서도 사랑을 발견해야 하겠군요. 정의가 아무리 귀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같으니까요.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