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재난지원금으로 막강한 위상 실감? '세대주'의 재발견

조선일보
입력 2020.05.23 03:00

2020년 세대주란 누구인가

재난지원금으로 막강한 위상 실감?  '세대주'의 재발견
일러스트= 김영석
"너는 데리러 올 세대주 없지?"

지난 2월 종영한 '사랑의 불시착'에서 결혼한 여성이 미혼인 친구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드라마의 배경은 북한. '세대주'는 북한에서 남편을 뜻한다. 주민등록등본 볼 때 말고는 잘 쓰지 않던 '세대주'라는 말이 최근 남한에서도 화제다. 코로나 사태로 정부가 긴급재난지원금을 '세대주'에게 가구당 최대 100만원씩 주기로 하면서부터다.

여성도 세대주 가능

지난 4일 정부는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결정하면서 신청자를 전국 2171만 가구 세대주로 한정했다. 세대주는 실제 주거 및 생계를 같이하는 사람의 집단인 '세대(世帶)'의 대표를 가리킨다. 가족과는 조금 다른 의미다. 가족이라고 해도 함께 거주하지 않고, 다른 지역에 살면서 독립된 주거와 생계를 꾸리면 같은 세대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미혼 자녀가 취직해서 독립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각 가정에서 마음대로 자신을 세대주라 생각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주민등록등본상 분명히 기재돼 있어야 한다.

과거에 남성만 호주(戶主), 즉 세대주가 되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폐지된 호주제에서 남성 세대주는 가정 재산 처분이나, 가족의 결혼 등에 대해 우월한 권리를 가졌다. 그러나 2008년 호주제가 없어지면서, 세대주 성별 제한도 사라졌다. 언제든 세대주 변경도 가능하다. 세대주라고 해서 과거처럼 우월한 권리를 갖는 것도 아니다. 세대주에게는 주민세가 부과되고 연 7000만원 이하 근로소득을 가진 무주택 세대주가 청약통장에 가입한 경우 납입금액의 40%까지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는 정도다.

서울 성동구에 사는 직장인 김모(31)씨는 여성이지만 세대주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사할 때 김씨가 주민센터에 전입신고를 하러 갔기 때문. 김씨는 "누구를 세대주로 할지에 대해 남편도 나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 없다"며 "당시 조금 덜 바빠서 주민센터 갈 시간이 있던 사람이 세대주가 됐다"고 했다.

재난지원금으로 힘 세진 세대주

실제 재난지원금이 지급되기 전에는 누가 세대주인지 의식하며 지낼 일이 별로 없었다. 세대주에게만 주는 특별한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난지원금이 세대주에게 일괄 지급되면서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가족이 지원금을 할당받으려면, 세대주 눈치를 봐야 한다. 특히 아직도 세대주 대부분이 남성인 상황이라, 가부장제를 부추긴다는 논란도 일었다.

서울 은평구에 사는 주부 임미현(가명·35)씨는 "세대주인 남편이 재난지원금이 들어온 카드를 주면서 '이번 달에는 생활비를 그만큼 적게 주겠다'고 해 크게 다퉜다"며 "사실상 아내를 대상으로 한 '생활 지원비 깡(카드 등을 에누리해 현금으로 교환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세대주 명의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로 재난지원금이 일괄 지급되면서, 소비한 내용이 고스란히 세대주에게 전달되는 것도 갈등 요인이 된다. 자기 몫을 사용할 뿐인데 괜히 눈치를 보게 되거나 주눅이 든다는 것. 맘카페 등에는 '카드사에 전화해서 결제 내역이 가는 휴대전화 번호를 바꾼다' '카드사 번호를 스팸 번호로 지정해 놓는다' 같은 해결책이 제시되기도 한다.

이런 지급 방식이 불편하다는 남성 세대주도 있다. 서울 마포구에 사는 홍모(37)씨 가정은 아이들 물건을 사거나 부부가 공동으로 필요한 물건을 살 때만 재난지원금을 쓰기로 했다. 신용카드가 하나뿐인 홍씨는 재난지원금이 들어 있는 카드를 사용할 수 없어 요즘엔 현금만 쓴다.

다양한 가족 양상

더 큰 문제가 있다. 가정 폭력, 세대주의 행방불명, 해외 장기 체류 등으로 세대주에게 일괄 지급한 돈을 세대원이 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행정안전부는 사안에 따라 이의 신청을 통해 세대원에 대한 지급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지만, 사실관계를 복잡하게 다투는 일이거나 증빙 서류 등을 갖추기 어렵다면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지난 8일 발표한 성명에서 "한국 사회는 1인 세대 증가 등 가족 구성은 다양해지고 있지만 사회보장 제도는 '가족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실제 다양한 가족 구성원을 포괄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며 "이번 재난지원금은 이러한 문제점이 그대로 노출됐다"고 했다. 여성단체연합은 "별거 중이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 세대주를 통해 자기 삶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상황은 없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중3 아들이 어디서 뭘 들었는지 재난지원금 자기 몫 20만원을 달라네요. 받으면 쓸 데가 있다고. 알았다고, 다음 달부터 하숙비 매달 내라고 했습니다.'

재난 지원금 이후 온라인에서 떠도는 우스갯소리다. 재미있는 농담으로 흘려듣지 말자. 지금 우리 가족 안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가늠하는 계기로 삼으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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