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위한 '자기만의 방'은 어디로 갔나

조선일보
  •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05.23 03:00 | 수정 2020.05.24 06:37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철
버지니아 울프와 여성주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위한 '자기만의 방'은 어디로 갔나
일러스트= 안병현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통과되던 무렵의 어느 날 밤, 버지니아 울프는 변호사로부터 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메리 비턴이라는 숙모가 뭄바이에서 낙마 사고로 숨졌고, 숙모의 유언에 따라 울프가 매년 500파운드의 유산을 받게 된 것이다. 그 후 울프는 생계를 위해 지속하던 신문 기고, 대필, 노인 책 읽어주기, 조화 만들기, 유치원 과외교사 등을 집어치우고 문학에 몰두한다. 1928년 10월 발표한 두 강연문을 편집하여 쓴 에세이 '자기만의 방'에서 그는 자신의 행운에 대해 정직하게 털어놓은 후, 이전까지 '문학'의 영역에 등장하지 않았던 진실을 말한다.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 만한 돈과, 자물쇠를 걸어 잠근 채 혼자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지요. 그리고 여성은 그저 이백 년 동안이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여성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성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일말의 기회도 없었던 거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울프의 주장에 '부르주아 페미니즘' 같은 딱지를 붙이고 매도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자기만의 방'이 세상의 진실을 간파하고 드러낸 작품이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돈이 많다고 해서 그 누군가가 꼭 자유롭고 행복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돈이 없다면 자유롭고 행복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리만치 어려워지니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보다 조금 앞선 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사회학자이며 철학자인 게오르크 지멜이 쓴 '돈의 철학'을 같이 읽어보자.

사람들은 돈을 이용해 사고팔고 주고받으며 자신에게 필요하거나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다. 즉, 돈은 교환의 매개체이다. 그렇기에 돈에는 어떤 '본질'이 없다. 내가 가진 1만원이나 다른 사람의 1만원이나 모두 1만원일 뿐이고 그 외의 다른 속성을 갖지 않는다. 돈은 누가 어떻게 벌었는지 등도 가리지 않는다. 그저 '많다' 아니면 '적다'로 표현되는 순수한 양(量)적 재화인 것이다.

여기서만 끝났다면 지멜의 논의가 오래 기억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천재성은 "돈의 소유의 양적 차이가 그 소유자에게 매우 현저한 질적 차이를 의미"한다는 것을 간파한 데 있다. 쉽게 설명해보자. 연금복권은 매달 500만원을 20년간 지급하고, 로또는 10억원대의 1등 당첨금을 한 번에 준다. 둘 중에 골라서 1등에 당첨될 수 있다면 무엇을 택할 것인가? 연금복권에 비해 로또가 훨씬 잘 팔린다는 현실이 말해주듯이 대체로 로또를 선호한다. 목돈이 주는 '질적 차이' 때문이다. 물론 매년 500파운드의 연금을 받으며 글을 썼던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듯, 갑자기 생긴 큰돈으로 평온한 일상을 깨뜨리는 대신 경제적 안정을 누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연금복권을 택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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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에서 시작해 게오르크 지멜을 운운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고통을 겪은 여성들이 마땅히 누렸어야 할, 그 돈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인생의 선택지와 자유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인 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의 충격적인 폭로 이후 우리가 처음 알게 된, 혹은 모른 척하고 있었던 역사적 비극과 회복에 대해,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짚어봐야 하는 것이다.

'돈의 노예' 같은 표현에 너무도 익숙해진 탓에 우리는 돈이 인간을 얼마나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는지 잘 떠올리지 못한다. 하지만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인간관계'가 뒤엉켜 있는 소규모 공동체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아도 그런 꿈을 품고 귀농하거나 하면 대체로 실망하는 것이 현실이다. 인습, 편견, 속박, '공동체'의 압력 따위 때문이다. 돈은 그런 것으로부터 개인을 가장 결정적으로 해방해주는 소유물이라고 지멜은 강조한다.

대도시 런던에 살며 매년 500파운드의 연금을 받는 버지니아 울프가 느낀 해방감도 그런 것이었다. "나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한 숙모님이 물려준 유산에서 나오는 몇 장의 종잇조각에 대한 대가로 사회는 닭고기와 커피, 침대와 숙소를 제공해 줍니다." 울프는 일에서 벗어남으로써 부질없는 감정도 털어내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증오심도 쓰라림도 없고, 다른 이에게 아부할 필요도 없으며, 대신 연민과 관용을 느끼다가 그마저도 넘어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자유"를 누리면서, 그는 우리가 기억하는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이다.

윤미향과 정의기억연대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향해 저지른 짓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회계 오류인지 회계 부정인지, 4억이면 충분할 전원주택을 7억에 구입해놓고 자기 아버지를 수위로 채용하는 게 정상인지 아닌지, 사실 관계와 불법 여지를 모두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민족주의를 넘어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단지 드러난 문제를 비난하는 것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윤미향과 정의연은 '자기만의 방'을 원했을 여성들까지 그저 '피해자'로 묶어둔 셈이기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개인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젊은 시절 못다 한 꿈을 이룰 수 있는 자유를 되찾아주고 싶었다면 그분들이 단 하루라도 젊고 건강할 때, 2015년 위안부 협상을 통해 일본이 준 배상금이 아니더라도,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경제적 도움을 드렸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현실은 짐승만도 못한 것이었다. 추운 단칸방에 시계 하나 안 걸어주고 온수매트 한 장 안 놓아 드렸다. 여성주의의 대의를 내걸고, 다른 여성을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에 몰아넣어 둔 채, 자기 딸은 미국 유학 보냈고 윤미향 본인은 금배지를 달았다.

다시 '자기만의 방'을 꺼내 든다. 울프가 강연문을 썼던 그 무렵, 영국의 '남성 문학'은 여성의 입을 틀어막은 채 오직 숭배와 예찬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 위선을 울프는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해부한다. 위안부 피해자를 우상(偶像)으로 박제했던 정의연의 행보 역시 그러한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이용수 할머니가 입을 열어 말한 진실 앞에, 윤미향뿐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가 대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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