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현 기자의 그 영화 그 음악] 사골국처럼 우려먹는 우디 앨런, 미워할 수 없는 이유

조선일보
입력 2020.05.18 03:00

'레이니 데이 인 뉴욕'과 재즈

김성현 기자
영화 '맨해튼'(1979)으로 시작해 '미드나잇 인 파리'(2011)로 끝나는 느낌이랄까. 최근 개봉한 우디 앨런 감독의 신작 '레이니 데이 인 뉴욕(A Rainy Day in New York)'은 뻔뻔하고 노골적인 자기 복제로 가득한 작품이다.

"뉴욕에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어. 이런 불안감과 적대감, 편집증은 다른 어디서도 느낄 수 없으니까." 첫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 '개츠비'(티모테 샬라메)가 넋두리처럼 늘어놓는 뉴욕 예찬은 40여 년 전 '맨해튼'의 도입부에서 써먹은 방식이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뒤 비를 맞으며 거리를 걷던 남자 주인공이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는 결말 역시 '미드나잇 인 파리'와 판박이다. 끝없는 자기 복제는 앨런 영화의 특징이지만, 재탕한 사골국처럼 전작(前作)들을 계속 우려먹으니 기시감이 앞선다.

'위대한 개츠비'를 연상시키는 주인공 이름이나 '뉴욕의 비 오는 날'이라는 제목에도 속지 말 것. 영화는 달콤한 로맨스보다는 좌충우돌 실수 연발의 코미디에 가깝다. "시간은 날아가지. 슬프게도 이코노미석처럼. 언제나 편안한 여행일 수는 없거든." 영화 속 개츠비의 대화는 스캔들로 얼룩진 감독 자신의 삶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개츠비(오른쪽·티모테 샬라메)는 비 오는 뉴욕 거리에서 전 여자 친구의 동생 챈(설리나 고메즈)과 조우한다.
개츠비(오른쪽·티모테 샬라메)는 비 오는 뉴욕 거리에서 전 여자 친구의 동생 챈(설리나 고메즈)과 조우한다. /그린나래미디어

숱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앨런 영화엔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빼어난 음악 선곡이다. 앨런 자신이 빼어난 클라리넷 연주자이자 재즈 애호가다. 이번 영화에도 배우 샬라메가 호텔 방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하는 장면을 슬며시 집어넣었다. 프랭크 시내트라의 목소리로 친숙한 '내겐 별일이 다 생겨요(Everything happens to me)'다. "골프 약속을 잡으면 비가 내리고, 파티를 열려고 하면 윗집 남자가 불평하죠. 감기에 걸리거나 기차를 놓치는 것처럼 내겐 별일이 다 생겨요."

우여곡절로 가득한 재치 있는 가사는 영화의 난리법석 소동과도 잘 어울린다. 로큰롤이 유행하기 이전의 1940~1950년대 고전적인 팝을 의미하는 스탠더드 팝이다. 엘라 피츠제럴드 같은 재즈 가수와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도 즐겨 불렀다.

1995년생 배우 샬라메의 앳된 목소리는 시내트라의 중저음이나 가냘프지만 호소력 있는 베이커의 목소리만큼이나 매력적이다. 영화에서도 고즈넉한 정취를 더하는 감미료 역할을 톡톡히 한다. 반세기 넘는 영화 경력의 앨런은 졸작이나 범작(凡作)에도 이처럼 자신의 영화적 지문을 찍어 놓았다. 열 번 밉다가도 꼭 한 번은 미소 지을 수밖에 없는 선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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