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의 pick] 가지나물, 취나물, 곤드레, 도라지… 봄바람 부는 산자락 닮은 싱그러운 맛

조선일보
  • 정동현
입력 2020.05.16 03:00

[아무튼, 주말]

나물밥상
서울 가락동 '명인밥상'

서울 가락동 ‘명인밥상’의 보리굴비밥상.
서울 가락동 ‘명인밥상’의 보리굴비밥상.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등교와 등산은 같은 말이었다. 부산 영도 꼭대기에 있던 초등학교에 다다르면 멀리는 오륙도가 보이고 위로는 봉래산이 서 있었다. 개학하고 봄이 되면 그 봉래산 자락을 꼬부랑 할머니들이 점령했다. 굽은 허리를 더욱 숙이고 땅바닥에 붙어 있던 그네들 옆에는 까만 비닐봉지가 있었다. 그 속에는 여리고 어린 쑥, 달래, 냉이, 두릅, 고사리 같은 나물이 가득했다. 간혹 도시락 반찬으로 그 나물들을 싸오는 친구들이 있었다. 어린 입맛에 나물의 맛은 거칠고 강했다. "또 나물이네!" 그네들은 으레 불평하며 옆자리 친구가 싸온 돈가스 같은 반찬을 부러워했다. 그래도 그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재잘거리는 어린애처럼 싱그러운 향기는 싫지 않았다. 그 내음을 맡고 있노라면 해풍을 온몸으로 받는 섬의 작은 산 중턱에 누워 있는 듯했다.

나물은 밭에서도 나지만 원래 산에서 뜯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명산(名山) 자락에 가면 나물 잘하는 집이 꼭 있다. 그중 경북 영주 부석사로 향하는 언덕배기 입구에 있는 '종점식당'은 무량수전에서 소백산맥을 조망한 후 내려와 자리 잡기 좋은 곳이다. 꽤 오래전 기억이다. 홀로 이 집에서 식사하던 때였다. 이 집 주인은 점심 나절 영업차 들른 한 사내를 굳이 자리에 앉혀 밥 한 그릇 내어주었다. 푸른 하늘에 따스한 볕이 식당 안쪽까지 들던 날이었다.

경북 지방답게 간고등어정식과 산채정식이 차림판 맨 위에 놓였다. 짭짜름한 간고등어는 이 고장의 고집 센 기상이 괜스레 느껴지는 듯하다. 그윽한 내음 풍기며 칼칼한 속내를 숨긴 청국장과 함께 조물조물 무친 산나물이 총총히 놓인 산채정식은 화려하지도 스스로를 뽐내지도 않는다. 산에서 깃든 고고한 맛은 부지런한 아낙의 손을 타 유순해져 위장으로 들어간다. 그 맛은 이곳을 지키는 사람을 닮았으리라.

북으로 조금 올라오면 충북 제천에 '학현식당슈퍼'가 있다. 본래 수퍼를 하며 이따금 공사장 인부를 대상으로 밥을 팔던 집이었다. 조금씩 소문이 나더니 이제는 상호에 어엿한 식당 자(字)가 붙었다. 거대한 토종닭을 잡아 만든 닭볶음탕과 백숙이 유명한 곳이지만 실제 주연은 나물이다. 본메뉴가 나오기 전 깔리는 도토리묵, 비빔국수에 두릅 같은 나물과 파를 함께 부친 산채나물 전을 보면 보통 입이 크게 벌어진다. 일단 양이 많고, 맛을 보면 돈 받고 파는 웬만한 음식을 뛰어넘는다. 밖으로는 서늘한 바람이 부는 산골의 한적한 식당에 앉아 두툼한 산채나물 전을 크게 찢어 입에 넣는다. 파전이 바닥을 보이면 오래 묵혀 놓은 장아찌를 닭고기, 밥과 함께 먹는다. 이름도 알기 어려운 약초 나물도 곁들인다. 그러면 장작을 패고 등짐을 져야 할 것처럼 몸에 힘이 붙는다.

산을 내려와 서울로 오면 근래 문을 연 가락동 '명인밥상'이 있다. 메뉴는 단출하다. 고등어구이, 제육볶음, 보리굴비 등 딱 필요한 것만 있는 구성이다. 그중 꾸덕꾸덕 말려 구운 보리굴비가 올라오면 솥밥 한 그릇으로는 기별이 가지 않는다. 조기의 쿰쿰한 향을 맡으며 바삭한 껍질, 쌉싸름한 뱃살을 씹으면 한국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생선 잘 굽고 심지어 밥도 잘 짓지만 모든 메뉴에 딸려 나오는 나물이야말로 알파요 오메가다. 흔히 먹기 어려운 나물이 종류별로 놓이는데 그 출신을 따지면 산과 들을 아우른다. 나무 소반에 받쳐 나온 나물은 그 가짓수가 많은데도 하나하나 흐트러지는 맛이 없다. 가지나물, 취나물, 곤드레, 도라지, 콩자반 같은 찬은 정겹지만 얽힌 맛의 구조는 평범하지 않다. 어리굴젓, 낙지젓도 대충 만든 모양새가 아니다. 그중 말린 호박무침, 멸치볶음, 시래깃국 같은 것을 보면 이곳 주인장이 경북 문경 출신임이 새삼 떠오른다. 고소하기보다는 간간하다. 젓갈과 소금보다는 묵힌 간장으로 간을 했다. 맛은 높은 산허리에 낀 안개처럼 그윽하게 몸에 흘러든다. 뜨거운 찻물을 솥에 부어 숭늉을 만들어 먹으면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한 것 같다.

그쯤 밥그릇에 숙였던 고개를 든다. 보이는 것은 일일이 손님에게 고개 숙이며 "맛은 괜찮냐"고 묻는 주인장의 두툼한 등이다. 묵묵히 말수가 없는 뒷모습은 너르고 유순한 산자락을 닮아 있었다. 누우면 하늘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여린 봄바람이 몸을 감는 그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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