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의 세대교체, 레깅스족이 점령하다

조선일보
입력 2020.05.13 03:00 | 수정 2020.05.13 09:42

배낭 맨 4050 대신 셀카봉 든 2030, 코로나로 헬스장 닫고 갈 곳 없어
인스타그램서 #등산 인증샷 유행… 북한산 탐방객 78% 늘어 45만명

새벽까지 비가 내린 데다 구름까지 꼈던 10일 오후 1시쯤 서울 종로구 인왕산 정상. '인왕산 정상, 338.2m'라고 적힌 표지석 주변엔 '인증샷'을 찍으려는 레깅스 차림의 젊은 여성들로 붐볐다. 20~30대 남녀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서울 마포구에서 온 이강현(여·29)씨도 '정상 인증샷'을 찍고 나서 바로 옆 삿갓바위 앞에 돗자리를 폈다. 친구 둘과 유부초밥 도시락과 이온음료를 꺼내 식사를 시작했다.

이씨는 3월부터 주말마다 서울 시내 '명산 투어'를 다닌다고 했다. 지난주엔 관악산에 올랐다가 봉천동 '샤로수길'의 인도 음식점에서 카레를 먹었고, 그 전주엔 북한산에 올랐다가 연신내 노래방에서 놀았다. 이씨는 "9개월째 다이어트 복싱을 배우다 코로나 사태가 터진 후로 체육관을 못 나가게 됐다"며 "등산을 다니면서 '못다 한 운동'을 대신하고 있다"고 했다. 반려견과 함께 정상 인증샷을 찍던 김미희(여·31)씨는 "작년 말 제주 올레길을 걷다가 취미를 붙여 등산을 시작했다"며 "'서울의 올레길'이라고 태그를 붙여 인스타그램에 올려야겠다"고 말했다.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왕산 정상에서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의 정상 등반 인증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올해 4월 북한산 탐방객이 작년 대비 78% 증가해 44만9068명을 기록했다.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왕산 정상에서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의 정상 등반 인증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올해 4월 북한산 탐방객이 작년 대비 78% 증가해 44만9068명을 기록했다. /안영 기자

20~30대 젊은 등산객이 급증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등산객은 중·장년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최근엔 젊은 등산 인구가 확연하게 늘었다. 사진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소셜미디어 '인스타그램'의 확산과 젊은 층 사이에서 이른바 '가성비'를 추구하는 경향이 반영된 변화다. 결정적으로 '실내 스포츠 활동을 어렵게 만드는 코로나 사태'가 2030 등산족(族)을 급증하게 만들었다.

국내 등산 인구는 코로나 사태와 맞물려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북한산 국립공원사무소에 따르면 국내에서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올해 2월 북한산을 찾은 탐방객 수는 24만4750명이다. 작년 2월 19만5516명에 비해 25% 증가했다. 날이 풀리고 '코로나 불안감'이 극에 달한 3월엔 42만7418명이 북한산을 찾았다. 작년 3월 대비 67% 늘었다. 4월에는 증가 폭이 78%까지 치솟으면서 44만9068명이 북한산을 올랐다.

현장에선 등산족 세대교체가 눈으로 확인된다. 아이젠과 배낭, 등산복 차림의 4050 세대 일색이던 등산로가 레깅스에 힙색(허리춤에 걸치는 가방)을 걸친 2030 세대로 붐비는 것이다. 3년째 부암동 일대 정기 산행을 다닌다는 유용준(52)씨는 "공터마다 둥글게 둘러앉아 호박즙과 오이를 나눠 먹던 5060 산악회를 요즘 찾기 힘들다"며 "등산은 더 이상 중년의 전유물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코로나로 인한 실내 시설 기피 현상이 가장 큰 원인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여기는 야외 활동으로 등산을 선택한 것이다. 지난달 25일 새벽 서울 서대문구 안산에 다녀왔다는 직장인 임모(28)씨에게는 25~27세의 또래 등산 메이트 3명이 있다. 임씨는 "3월 중순 '고강도 사회적 거리 두기' 탓에 전국 피트니스 클럽이 휴무에 돌입하자 직장 동료들이 속속 산행에 합류했다"고 말했다.

젊은 층의 '등산 붐'은 소셜미디어를 타고 확산됐다. 20~30대가 주로 이용하는 인스타그램에 #등산, #등산스타그램, #혼산, #혼산스타그램으로 검색하면 270만개의 게시물이 검색된다. 주로 '○○산 해발 ○m'라고 쓰인 산 정상의 바위 앞에서 찍은 '인증샷'들이다.

젊은 층은 등산을 게임처럼 즐기기도 한다. 경기도 시흥에 사는 진모(28)씨는 지난 2일 '사대문 등산 투어'를 다녀왔다. 한양도성길을 따라 백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 구간을 돌고 각 구간에서 스탬프를 전부 모으면 완주기념배지를 받을 수 있는 서울시 산행 프로그램이다. 진씨는 "출발 지점도 선택할 수 있고, 구간별로 입산 시간이 제한돼 있어 시간 안배를 잘해야 한다"며 "게임에서 퀘스트(레벨별 수행 임무)를 깨듯 즐길 수 있어 지난달부터 친구 2명과 함께 매주 찾고 있다"고 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또래 집단의 압력)에 특히 민감한 2030 세대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유되는 등산 유행에 발 빠르게 반응한 것"이라며 "실용적인 관점에서도 '운동 애호'의 범위가 등산으로까지 확장된 걸로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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