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XX가 성범죄자다'... 일반인 '박제'하는 민간 자경단(自警團)

입력 2020.03.27 11:59 | 수정 2020.03.27 14:50

성착취물 공유자 잡는 텔레그램 방 등장
"거래하자" 접근 신상 털어 공개
억울한 피해자 생길 수 있어
"정보를 캐냈다면 수사기관으로"

26일 오전 한 텔레그램 채팅방 ‘주홍글씨’에 한 남성이 찍은 ‘셀카’로 보이는 사진이 올라왔다. 같이 올라온 메시지에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써 있었다.

“‘박사방’ 자료소지자. 이름 ○○○. 전화번호는 010-××××-××××. 증거가 확실한 범죄자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동영상이 올라왔다. 영상을 재생하자 10대 소년의 얼굴이 화면에 꽉차게 나왔다. “저는 중학생 △△△입니다. 성범죄를 저질러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뒤 메시지가 올라왔다. “이 사람은 전교 부회장이었던 모범학생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들속에 모습을 갖추며 살아가는 도촬범이었다.”

’n번방’ ‘박사방’ 성착취 영상 유포 사건이 화제되며 성착취물 공유범의 신상을 공개하는 자경단(自警團)이 등장하고 있다. 자경단은 사적 구제를 벌이는 민간 단체를 일컫는 말이다. 텔레그램방 ‘주홍글씨’ 참여자는 27일 오전 약 2900명이다. 최근 ‘주홍글씨’를 잇는 다른 방도 나오고 있다. 채팅방 ‘박사방의 진실’ ‘버닝썬’ 등이 특정 인물의 얼굴과 신상을 공개하고 있다.

‘주홍글씨’의 운영자 15여명은 성착취 영상의 구매자 또는 판매자로 위장해 공유자들을 적발한다. 거래를 위해 접촉해야 핸드폰 번호와 인터넷 계정 등을 받기 쉽기 때문이다. 이렇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인터넷을 통해 소셜미디어 계정을 알아내고, 그 뒤로는 “주변에 알리고 싶지 않으면 ‘사죄 동영상’을 찍어 보내라”고 협박하는 식이다. 이 방은 지난해 7월 아동 음란물 공유범을 잡겠다며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올라온 얼굴 사진, 신상 정보가 올라온 사람은 200여명이 넘는다.

그뒤를 따르는 채팅방이 최근 속속 생겨났다. 26일 개설된 한 텔레그램 단체 대화방에는 한 유명 인터넷방송 진행자의 여권을 공개했다. 운영자는 이 유명 진행자가 ‘박사방’ 조주빈(25·구속)에게 돈을 받고 피해 여성 물색을 도왔다고 주장하며 조주빈과의 대화 내역도 공개했다. 오늘 기준 8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방에 들어와 이 진행자의 실명과 얼굴을 봤다. 유명 진행자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수년 전 피싱 사이트에 유출됐던 여권 사진이 이 채팅방에 올라와 있어서 경찰에 신고했다”며 “채팅방 내용도 내가 아니다”라며 법적 대응할 방침을 밝혔다.

경찰이 ‘박사방’에 들어갔다고 주장하는 채팅방도 있다. 340명이 참여한 ‘버닝썬’ 방에는 부산지방경찰청 소속 한 경찰의 이름, 직위, 사진, 메시지 내역까지 모두 ‘박제’되어 있다. 26일 부산지방경찰청은 소속 경찰관이 ‘박사방’에 들어간 사실이 없다고 내부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목당한 경찰도 “신상 정보를 턴 이들을 고소했다”고 밝혔지만, 현재 이 방에는 여전히 신상 정보가 올라와 있다.

자경단을 자칭하는 이들이 모인 자유대화방 ‘최고인민법원’에는 최대 900명까지 들어와 있었다. 이들은 텔레그램 방에 올라온 이들의 얼굴 사진을 공유하며 ‘저 ×× 였다’ ‘인상부터 범죄자’ 등의 이야기를 나눴다.

전문가들은 법치 국가의 기본 원칙을 어기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장현석 경기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사실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가해의심자 신상을 공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라며 “각자 수집한 정보를 수사기관에 제공하고, 수사에 협조하는 것이 맞는 방향”이라고 했다.

‘주홍글씨’의 운영자 중 한명으로 알려진 대화명 ‘중국전문’은 오늘 오전 8시 50분 자유대화방에 “수사망이 좁혀오는 게 느껴져, 잠적해야 겠다”고 했다. 다른 이용자들이 “무슨 잘못을 했느냐”며 정당한 행위라 옹호하자 ‘중국전문’은 “살인범 장대호가 ‘악인’을 죽인 사건이라 말해도 정당화안되듯, 우리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고 답했다. 그러나 다른 이용자들은 “판사님도 선처하실 듯”이라며 더 많은 사람의 신상을 공개하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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