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乙만 서러운 100조 대출 현장

입력 2020.03.27 03:15

장형태 산업2부 기자
장형태 산업2부 기자

본지 26일 자 A3면에 정부의 코로나 지원 대출을 받기 위해 금융기관 여덟 곳을 '뺑뺑이' 돌고도 못 받았다는 경기도 동탄 김모(48) 학원장의 이야기가 실렸다. 그의 뺑뺑이는 대통령의 말에서 시작했다. 다른 학원 운영자가 "뉴스에 문재인 대통령이 50조원 규모의 비상 금융 조치를 한다고 나왔다. 신용등급 1~3등급은 연이율 1.5%로 빌려준다"고 전해준 말을 믿었다. 김 원장은 신용등급 2등급이다. 발표 1주일 뒤에 그는 주거래 은행을 찾았으나, "지침 받은 게 없다"는 답을 들었다. 그는 "너무 힘들어, 속고 또 속아도 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정부의 대책을 소개하는 기사를 쓴 필자는 요즘 죄인이 된 기분이다. 소상공인지원센터나 신용보증재단에 대출 받으러 온 자영업자들에게 "어떻게 지원책을 아셨냐"고 물으면 모두 "인터넷 기사 보고 왔다"고 했다.

은행 직원도 힘들어한다. 서울 시중은행의 한 직원은 "우리도 고객들이 보여주는 기사를 보고서야 지원책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며 "위에서 새 대책을 내놓아도 현장까지 내려오려면 시간이 한참 걸린다"고 했다. 대구의 한 은행원은 요즘 대출 신청이 너무 몰려 밤 11시에 퇴근하고, 집에도 서류를 가져간다. 그는 "고객이 '나라는 대출해준다는데 너희들이 왜 안 해주나'라며 퍼붓는 욕설을 듣고 펑펑 울었다"고 했다.

소상공인 지원센터 직원도 마찬가지다. 25일 서초동 서울남부센터에는 오전에 '코로나 자금 오늘 상담 마감' 안내문이 붙었다. 그러나 점심 직후에도 소상공인들이 수십 명 몰려왔다. 한 직원이 나와 "오늘 상담은 끝났다. 90명이 상담을 받았는데, 번호표 받아간 분이 300명이다. 이분들 먼저 해드려야 해서 내일 일찍 줄 서도 상담을 받기 힘들다"고 했다. 그러자 소상공인들은 이 직원을 붙잡고 "7000만원 빌려준다며 뭔 소리냐" "내 신용등급만 좀 봐주고 들어가라"며 언성을 높였다.

은행이나 소상공인지원센터에 힘이 있어 뭔가 할 수 있는 갑(甲)은 아무도 없었다. 되는 일이 없다보니 짜증내고 욕설하는 을(乙)들만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있었다. 누구 잘못인가. 정부 지원책을 기사로 쓴 기자들 잘못인가. 대출 정책이 안 내려왔다고 사실대로 말한 은행원의 잘못인가. 줄지어 선 소상공인들을 돌려보내야 하는 소상공인지원센터 직원 잘못인가.

지난 19일 1차 비상경제회의서 나온 대책도 현장에 내려오지 않았는데, 정부는 24일 2차 대책을 또 내놓았다. 이제는 100조원 규모란다. 이젠 더 긴 줄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높은 정부 분들은 제발 아랫사람 보고만 듣지 말고, 단골 은행 지점에 전화만이라도 한번 해보기를 바란다. 그러고 나서도 '비상한 조치' '50조원' '100조원'이란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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