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정부는 왜 삼성에 '마스크 해결사' 요청을 했을까

입력 2020.03.26 15:26 | 수정 2020.03.26 17:21

삼성 통해 5300만장 어치 분량
마스크 원료 해외서 확보한 정부
'大대공황급 경제 위기' 맞아
대기업 정책 바꿀 마지막 기회

#1. 대전시 유성구에 있는 마스크 제조사 ‘레스텍’. 6년 전 설립된 이 회사의 하루 생산량은 지난달 말까지 12만장이었으나 26일 현재 17만장으로 50% 늘었다. 생산 설비를 전혀 추가하지 않았는데도 그렇다. 비결은 이달 3일부터 삼성전자의 제조 전문가 7명이 파견나와 해준 ‘족집게’ 과외였다. 박나원 공장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다른 회사 직원들이 자사 비용을 들여 토·일요일에도 출근해 도와준 건 처음이었다. 작업 동선부터 생산량까지 모두 좋아졌다”고 말했다.

이달 16일 대전시 유성구에 있는 마스크 제조기업 '레스텍'에서 박나원 공장장(오른쪽)과 권오창 삼성전자 스마트공장지원센터 멘토가 마스크 본체와 귀 끈 연결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삼성전자 제공
이달 16일 대전시 유성구에 있는 마스크 제조기업 '레스텍'에서 박나원 공장장(오른쪽)과 권오창 삼성전자 스마트공장지원센터 멘토가 마스크 본체와 귀 끈 연결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삼성전자 제공

마스크 외관을 찍는데 꼭 필요한 금형(金型)이 마모된 것을 보고 삼성 직원들은 금형을 직접 제작해 7일 만에 공급해 줬다. 중국에 주문·조달하면 1개월 걸리는 일을 3주 당긴 것이다. 또 생산에서 포장으로 넘어가는 설비·레일을 조정해 45m이던 물류 동선을 25m로 단축, 설비 효율을 높였다. 레스텍 외에 에버그린(경기 안양), E&W(경기 안성) 등에 투입된 삼성의 전문가는 모두 37명. 이들은 주말을 반납한 채 10일간 해당 회사에 꼬박 상주했다. 71만장이던 세 회사의 마스크 하루 생산량은 108만장으로 껑충 뛰었다.

#2. 지난달 중순 삼성전자의 한 해외 법인장은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아무도 모르게 진행해야 한다”며 “마스크 생산 원료를 비밀리에 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신종 코로나19’로 전 세계에서 마스크 품귀 현상이 벌어지는데, 정부가 직접 나서면 원료를 구하지 못할 듯 해 민간 기업에 협조를 요청한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현지 사정에 밝은 삼성물산까지 가세해 이들은 ‘007작전’ 같은 비밀 작업을 벌였다. 이렇게 해서 마스크 필터용 원료인 부직포(MB·melt-blown) 총53톤(t)을 확보했다. 이달 23일 처음 들어온 2.5t을 포함해 올 6월까지 모두 수입되면 최대 5300만 장의 마스크를 만들 수 있다. 이는 평일 기준 전국에서 판매되는 6~7일치 공적 마스크 물량이다.

흥미로운 것은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 19’ 위기 국면에서 삼성에 먼저 ‘SOS’를 쳤다는 사실이다. 현 정부는 북한·중국에는 한없이 너그러운 ‘천사표’인 반면, 대기업들에게는 ‘저승 사자’처럼 냉랭하게 대해왔다. 특히 경영승계 논란과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등을 구실로 최근 3년간 거의 모든 삼성계열사를 상대로 50차례 넘게 전방위 압수수색을 벌였다. 그런 문재인 정부도 ‘마스크 대란’에는 속수무책이었는지, 삼성에 도움을 부탁한 것이다.

이달 17일 미국에서 발간된 '삼성의 부상'. 미국 IT전문 기자인 제프리 케인이 약 400명을 인터뷰해 썼다./amazon.com 캡쳐
이달 17일 미국에서 발간된 '삼성의 부상'. 미국 IT전문 기자인 제프리 케인이 약 400명을 인터뷰해 썼다./amazon.com 캡쳐

지난주 미국에서 출간된 391쪽 분량의 ‘삼성의 부상(Samsung Rising)’을 쓴 미국 IT전문기자 제프리 케인은 “한국의 국가정보원은 삼성과 같이 하며, 삼성은 정부와 함께 일한다”고 했다. 이 책은 무명(無名)의 삼성이 애플·소니와 경쟁하는 세계적 기업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집중조명했다. ‘적폐 청산’과 ‘도덕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2020년의 문재인 정부도 과거 정권과 똑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으니 놀랍고 충격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기업과 현 정부와의 ‘협업’은 이제 오픈 게임일 뿐이다. 정부가 대기업들에 손을 내밀며 부탁하는 것은 지금부터가 본격 시작일 것이다. ‘코로나 위기’가 “대(大)대공황으로 번질 수 있다”는 관측이 퍼지고 있어서다. 이렇게 되면 마스크 난리는 소꿉놀이하는 수준이고, 20년전 IMF 위기때 보다 더 깊고 넓은 경제·사회적 충격이 불을 보듯 뻔하다. 실업자들이 전국에서 쏟아지고 각종 세수(稅收)가 급감한다면, 누가 일자리를 지키고 나라 곳간은 누가 채울 건가.

평창올림픽조직위원장을 지낸 이희범 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88서울올림픽과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은 정주영, 이건희 회장과 현대와 삼성그룹이 없었다면 유치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단언한다. 최진석 건명원 초대 원장은 “똑똑한 정권이라면 정부 정책을 펴는데 쓸 뭉칫 돈을 세금으로 대주는 대기업에 감사하고 그들이 더 크도록 도와주는 게 정상”이라고 했다.

고(故) 정주영 회장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1998년)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딱 한번 ‘호된 야단’을 맞은 사례가 나온다.

“울산 현대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차관을 얻기 위해 백방으로 줄을 댔다가 모두 거절당한 뒤 청와대에 들어가 ‘도저히 못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중략) 불같이 화를 낸 박 대통령으로부터 한참 후 ‘한 나라의 대통령과 경제 부총리가 적극 지원하겠다는데…. 이건 꼭 해야만 하오’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날부터 새로운 각오와 결심으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165~167쪽)

박정희 대통령은 울산 현대조선소 건립 포기 의사를 밝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그를 다시 뛰도록 독려하며 전폭 지원해 줬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 박근혜 영애와 함께 현대그룹 계열사 공장 현장을 둘러 보고 있다./조선닷컴
박정희 대통령은 울산 현대조선소 건립 포기 의사를 밝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그를 다시 뛰도록 독려하며 전폭 지원해 줬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 박근혜 영애와 함께 현대그룹 계열사 공장 현장을 둘러 보고 있다./조선닷컴

불모의 땅에서 한국이 세계 1위 조선 강국으로 우뚝 선 데는 기업인을 믿고 밀어준 지도자가 있었다. 임기 2년을 남겨둔 문재인 정부 앞에 전례없는 경제 위기가 벌어지는 형국이다. 지금이야말로 현 정부가 대기업들에 대한 정책 노선을 바꿀 마지막 기회이다.

적(敵)을 대하는 것 같은 불신과 차가움을 버리고 경제 전쟁을 함께 헤쳐나가는 전우(戰友)이자, 동반자로서 말이다. 대기업들은 누가 뭐라 해도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국의 보배요, 마지막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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