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재앙 이후의 재앙

조선일보
입력 2020.03.25 03:16

코로나가 덮어버린 선거 분위기
與, 친문·조국으로 집토끼 몰이… 선거 후 진영 갈등 격화 불 보듯
감염병 끝난 뒤 혼란 더 두렵다

이동훈 논설위원
이동훈 논설위원
선거가 코앞이란 사실을 체감하기 힘들어 책상 달력 날짜 아래에다 일일이 숫자를 적어 넣어야 했다. 모든 선거가 중요하지만 이번 총선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짓는 특히 중요한 정초(定礎) 선거라고 했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코로나가 나라와 세계를 뒤덮으며 선거 분위기를 제대로 못 느낄 정도가 돼버렸다. 눈앞에 죽음의 공포가 넘실대고, 경제 위기가 현실이 되고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선거를 앞두고 코로나가 닥치는 것을 보고 기자가 아는 친야 성향 몇몇은 반색했지만 반색할 만한 일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선거가 코앞에 닥치고 나서다. 문재인 정권은 모든 일에 핑곗거리가 생겼다. 방역 실패는 코로나 팬데믹에 덮였고, 경제 실정은 코로나발 세계 경제 위기에 묻혔다. 삼 년째 앓아누운 환자에게 손도 못 대던 실력 없는 주치의는 사흘 전 걸린 감기에 모든 책임을 떠넘겨 놓고 온갖 요란을 떤다. 건강과 경제에서 실존의 위협이 목줄을 조이려 하자 사람들은 몇 달 전의 일도 되새김질 못 한다. 위기일수록 정권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해온 착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파렴치범을 법무장관에 임명하고, 선거 공작을 해대고, 내 편이라면 어떤 비리도 감싸는 정권의 진면목에 분개하던 불과 얼마 전의 일을 떠올리면 기가 막힐 따름이다. 공소장을 감추고 온갖 거짓말을 해가면서 정권이 덮으려 했던 진실이 어이없이 국민 망각 속으로 사라져간다. 진실의 반대말은 허위가 아니라 망각이란 말이 틀리지 않는다.

눈치 빠른 민주당의 선거 전략은 '집토끼 몰이'다. 몇 차례 총선을 가까이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지만 이번 민주당 공천만큼 노골적인 순혈 공천을 보지 못했다. 현역 의원 교체 비율이 근래 들어 가장 낮은 29%다. 그마저 비주류 의원들 대부분을 날리고 그 자리를 청와대 출신들로 채웠다. 한때 만악(萬惡)의 근원으로 여겨지던 586 운동권 출신과 친문들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비례당을 않겠다'던 말을 180도 뒤집은 것도 모자라 '개싸움'을 하겠다는 친(親)조국 인사들을 앞세워 후보를 꾸렸다. 광화문에 모였던 국민 속을 뒤집어놓기로 작정한 듯 '조국은 조광조'라고 외친다. '그래서, 뭐, 너희가 어쩔 건데'라고 윽박지르는 것 같다. 이번 선거는 중도가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 표만 결집해도 이길 수 있다, 투표율이 낮을 터이니 서초동에 모였던 집토끼만 투표장으로 다시 끌어내면 된다, 대충 이런 계산이 선 게 아닐까 싶다.

20여일 뒤 선거 승패를 예단하기는 쉽지 않지만 선거 뒤에 일어날 일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선거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진영 갈등의 틈새는 더 벌어질 것이다. 폭주하는 권력의 굉음과 반대쪽의 비명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은 선거 이후 볼륨을 더 키울 수 있다. 선거 승패를 떠나 당분간 나라를 책임진 집권 세력이 다양성이 사라진 채 단일 유전자로 구성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다양성이 사라진 세력은 강한 듯 보여도 실제론 허약하고, 나라 망치는 바이러스를 뿜어내는 숙주가 되기 십상이다.

브레이크를 잡아야 할 타이밍에 브레이크를 잡지 못한 정권은 어김없이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1996년 총선에서 이기고 이듬해 IMF 사태로 추락한 김영삼 정권이 그러했다. 박근혜 정권도 지방선거에서 견제받았다면 총선 참패와 탄핵 추락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와중에 닥친 고난은 오롯이 국민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코로나가 잦아들고 종식을 선언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뒤에 닥쳐올 재앙이 더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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