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틀어막은 '조선의 입'… 기자들은 책상 치며 통곡했다

조선일보
  • 이태훈 기자
    입력 2020.03.23 03:00

    [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21] 本紙 강제 폐간 되던 날
    1940년 8월 10일 마지막 신문제작… 신문용지 공급 줄이며 압박해 와
    이후에도 사옥 등 넘기라며 협박

    만해·윤석중 애통해하는 詩 남겨
    1면엔 다시 나올 날 기약한 팔면봉·'씨앗은 죽어 새싹 내나니' 실어

    "조선일보를 죽인 자 누구냐! 미나미(조선총독) 놈아, 우리 사원을 함께 죽여라!"

    일제가 조선일보를 강제 폐간한 1940년 8월 10일, 경리부 직원 이학규는 태평로 사거리로 뛰쳐나가 대성통곡했다. 당시 전남특파원 최인식은 "전 사원이 모여 책상을 주먹으로 치며 통곡하고 나라 없는 설움에 울부짖었다"고 했다. 편집국장 함상훈은 "기자들이 기사를 쓰다 더러 눈물을 닦아내는 걸 보게 되었다"고, 기자 유봉영은 "공무국 직원들은 폐간호를 찍는 윤전기를 붙들고 울었다"고 기억했다. 일제는 이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해 식민지 조선의 '입'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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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8월 10일 폐간호를 만들고 난 뒤, 조선일보 편집국 기자들은 비통함과 분노가 서린 표정으로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가운데 맨 뒤편 지도 앞에 앉아 있는 편집국장 함상훈의 앞쪽으로 작가로도 명성 높았던 학예부장 김기림, 훗날 예술의전당 이사장을 지내는 작가 조경희(학예부 기자), 조선일보 회장을 지내는 홍종인(사회부장) 등의 모습이 보인다. /조선일보DB
    1937년 중일전쟁과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을 거치며 일제는 조선·동아일보를 더욱 옥죄었다. 물자 절약을 명분으로 1938년 일본에서 시작된 신문사 통폐합 조치가 1939년 말 조선에도 들이닥쳤다. 조선·동아 폐간 계획이 담긴 총독부 한 비밀문서는 "조선 통치의 지도정신은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인데, 그 완성은 본질적으로는 조선인이 지닌 민족의식의 저류에 의해, 형식적으로는 조선·동아일보의 존재에 의해 저해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두 신문을 죽이지 않고는 조선을 온전히 제 것으로 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1940년을 전후해 총독부가 긴박하게 움직였다. 일본 건국기념일 '기원절'이자 창씨개명 시작일이던 2월 11일에 맞춰 두 신문을 자진 폐간 형식으로 없애겠다는 계획이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와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를 불러 "2월 11일에 맞춰 매일신보와 통합하는 것이 어떠냐"고 자진 폐간을 종용했다. 두 사람은 거절했다. 총독부는 신문용지 공급을 줄이며 두 신문사의 목을 졸랐다.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까지 신문 구독을 끊게 한 상태였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신문이 다시 나올 날을 기약한 팔면봉 외
    8월 9일 오후 6시, 조선일보는 태평로 사옥 대강당에서 재직 중 작고한 사원들에 대한 추도회를 열었다. 10일 자 조선일보는 "천장의 샹들리에도 마음 있는 듯 흐리다.… 장내는 숨결 소리 하나 없이 고인을 통하여 신문사의 지난날을 생각하고 신문사를 통하여 고인을 애도하는 정이 더욱 간절하였다"고 그 풍경을 묘사했다. 10일 제작된 폐간호(지령 6923호)에는 편집국장 함상훈이 조선일보 20년사를 정리해 1면에 실었다. 1면 중앙에는 '20년의 역사를 남기고 본보 금(今) 10일로써 폐간'이라는 사고(社告)가 자리 잡았다. 폐간 사설과 사장 방응모의 '폐간에 제하여'도 함께 실렸다. 폐간호 1면에서는 '콩과 팥은 두들겨 껍질을 벗고, 씨앗은 썩고 죽어 새싹을 내나니'라고 신문이 다시 나올 날을 기약한 팔면봉〈그래픽〉이 단연 심금을 울린다. 폐간호 제작 뒤 마지막 사원대회에서 사회자는 말했다. "이제 무슨 말을 하리까! 성자(聖者)가 왕생하듯 우리 동지들도 고요히 작별합시다! 그러나 후일 다시 이 자리에 모일 것을 기대합시다!" 만해 한용운은 강제 폐간의 울분을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진 서울의 가을…'로 이어지는 한시(漢詩) '신문이 폐간되다'에 담았다. 아동문학가 윤석중, 미당 서정주도 강제 폐간을 애통해하는 시를 남겼다.

    강제 폐간으로 끝이 아니었다. 총독부는 그 뒤에도 집요하게 조선일보를 괴롭혔다. 부사장을 지낸 최용진의 회고에 따르면, 폐간 4개월여 뒤 미쓰바시 경무국장 등 총독부 실세 관료들은 방응모 사장을 불러내 "태평로 사옥을 포함해 동산·부동산 전부를 백만원에 넘기라"고 압박했다. 방응모는 "나는 금년 4월 30일에 참척(慘慽·자식의 죽음)을 보았고 또 필생의 사업이던 조선일보를 8월 10일에 죽였으니 참척을 두 번 당한 것"이라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 응낙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때 지켜낸 사옥과 재산은 광복 후 복간의 기반이 됐다.

    한국 언론학 1세대인 고(故) 최준 중앙대 교수는 저서 '한국신문사(史)'에서 "동아는 해체와 동시에 동본사(東本社)를 조직했고, 조선 역시 조광사의 출판사업에 몰두했다. 양사의 이러한 강제 폐간 후 대비책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단말마적인 군국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다만 때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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