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머리가 복잡할 때 파스타를 뽑는다

입력 2020.03.23 03:00

[김성윤 기자의 맛 이야기]

김성윤 조선일보 음식전문기자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신문사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모처럼 쉴 수 있는 귀한 토요일이었다. 당시는 주5일제가 시행되지 않아 기자는 신문이 나오지 않는 일요일 전날인 토요일 하루 쉬었는데, 그나마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년병 때라 토요일도 일하는 경우가 잦았다. 너무 오랜만에 쉬니 놀러 나가기도 귀찮았다. 아침 늦게 일어나 한참을 멍하게 앉아있는데 '모처럼 파스타나 만들어볼까'란 생각이 떠올랐다.

대학생 때 이탈리아인 요리사에게 파스타를 배운 적 있다. 어머니가 "이탈리아 유명 요리사가 한국을 방문한다더라"며 "요리수업을 한다는데 들어보라"며 등록해 주겠다고 하셨다. 우리 집이 워낙 개방적이라 사내아이라고 부엌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는커녕, 요리하는 걸 권장하는 분위기였다. 그 이탈리아인 요리사가 서울 시내 한 요리학원에서 2시간 정도 짧은 쿠킹 클래스를 진행했던 것 같다. 가장 기본적인 이탈리아 음식 서너 가지였던 듯한데, 몇 년이 지나 신문사에 입사할 무렵에는 다 까먹고 파스타 만드는 법 하나만 기억하고 있었다. 워낙 간단했기 때문이다.

흔히 '프레시 파스타(fresh pasta)'라고 부르는 생(生) 파스타였다. 재료는 밀가루와 달걀 단 두 가지. 식탁이나 싱크대 상판 등 평평한 곳을 깨끗하게 닦거나 넓은 도마를 놓는다. 밀가루 1컵을 봉긋하게 산처럼 쌓은 뒤 꼭대기를 손가락으로 헤집어 화산 분화구처럼 만든다. 달걀 하나를 깨뜨려 넣고 흰자와 노른자를 푼 다음 밀가루와 섞어 전체적으로 노란색을 띠도록 반죽한다. 이탈리아 요리사는 "한국 달걀은 이탈리아 달걀보다 작은 것 같다"며 "완성된 반죽이 아기 엉덩이 정도의 탄력이 되도록 밀가루 양을 가감하라"고 했다. 반죽을 최소 30분 숙성시켜 밀대로 얇게 밀고 칼국수처럼 칼로 써니 파스타면이 만들어졌다.

파스타
게티이미지뱅크
파스타라고 하면 포장 안에 들어 있는 딱딱한 '드라이 파스타(dry pasta)'만 알던 때라 '이렇게 부드러운 생면 파스타도 있구나' 그리고 '파스타를 이렇게 쉽게 만들 수도 있구나' 두 번 놀랐다. 이후로 자주 파스타를 만들어 가족이나 친구들을 대접했는데, 신문사 입사 후 잊고 지내다 모처럼 파스타를 만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밀가루와 달걀을 꺼내 파스타 반죽을 시작했다. 놀라운 치유 효과가 있었다. 달걀물과 밀가루를 섞고 치대는 단순 노동을 반복하자 잡생각이 서서히 사라졌다. 반죽에 온 정신이 집중됐고, 멍했던 머리가 맑아지고 상쾌해졌다. 컴퓨터 앞에 온종일 앉아 정신노동만 하다가 비록 가벼운 수준이나 간만에 육체노동을 하고 나니 기분 좋은 피로감에 몸이 젖었다. 파스타를 끓는 물에 익혀서 올리브오일과 소금, 토마토로 만든 단순한 소스에 버무려 먹으니 순수한 행복감이 밀려왔다. 이날 이후로 머리가 복잡할 때면 파스타를 뽑았다. 그러면 확실히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우한 코로나 사태로 온 나라와 세계가 혼란스럽다. 특히 나의 취재 분야인 외식업계가 이만큼 심각한 위기였던 적이 없었던 듯하다. 만나서 듣는 얘기마다 우울하니 덩달아 우울해진다. 모처럼 밀가루와 달걀을 꺼내 파스타를 만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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