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는 내가 김수환 추기경보다 美男이었죠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20.03.21 03:00

[아무튼, 주말- 김형석의100세일기]

며칠 전 '월간조선' 3월호를 받았다. 지난달 강원도 양구에 있는 '철학의 집'에서 가졌던 인터뷰 내용이 여러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의 모교 사진도 볼 수 있었고, 안병욱·김태길 교수와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철학의 집'은 제법 기념관다운 면모를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사진들 가운데 내가 일본의 조치(上智)대학에 다닐 때의 것도 있었다. 한국 유학생들이 모여 찍은 1940년대의 사진이다. 앞줄에 앉아 있는 학생들 가운데 왼쪽 끝자리를 차지한 이가 김수환 추기경이고 오른쪽 끝에 내가 앉아 있다. 사진을 보는 사람마다 "학생 때는 김 교수님이 미남자였네요"라고 말한다. 나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으면서도 "내가 미남자가 아니고 김수환 추기경이 잘생기지 못했지요"라고 말한다. 웃기는 하면서도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추기경은 나보다 2년 후배였다.

젊었을 때는 내가 김수환 추기경보다 美男이었죠
일러스트= 김영석
그러나 우리는 행복하고 보람 있는 대학 생활을 계속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는 일본 대학생들이 징집되어 전선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일본 군부는 한국 대학생들도 지원병이라는 명목으로 군에 입대시키라는 지령을 내렸다. 우리는 경찰의 압력을 받으면서 강제 징병을 모면할 길이 없었다. 나와 김수환도 그때 헤어지고는 긴 세월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다.

추기경은 해방 후에 사제가 되기를 결심하고 독일로 가 철학과 신학을 계속했다. 지도교수가 권하는 학자의 길보다는 사제의 소명을 받아들였다. 사회철학 분야에 관심이 컸던 것으로 추측한다. 바티칸의 주목을 받는 추기경이 되었고, 천주교 개혁의 큰 사명을 체감했던 것이다. 가장 연소한 추기경이었으나 '교회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 사회가 교회를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혁신적 사명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천주교와 한국 사회에 잊을 수 없는 정신적 공헌을 남겼다.

나는 개신교 평신도로 지냈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는 신앙인보다 철학도의 자세로 임했다. 지성을 갖춘 자유인이 되고 싶었다. 반(反)기독교적인 무신론자의 철학에도 관심을 가졌고 공감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신학이나 철학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 문제 해결에 있다는 명제에 봉착했다. 우리 겨레가 희망을 갖고 역사의 비극적 운명을 해결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나 자신이 나를 구원할 수 없듯이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합쳐도 세계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수환은 사제의 길을 택했고 나는 신앙인의 의무를 갖고 살았다. 우리는 2000년 김 추기경이 제2회 인제인성대상(仁濟人性大賞)을 받았을 때 마지막으로 만났다. 추기경은 "선배님의 뒤를 이어 제가 수상을 해서 영광입니다"라고 했다.

지금 나는 김 추기경의 선종 전 사진을 보면서 생각한다. 추기경의 인품이 100점이라면 나는 몇 점쯤일까. 80점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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