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미도 송가인도… 딩동댕 아저씨 작품입니다

조선일보
입력 2020.03.14 03:00

[아무튼, 주말- 김미리기자의 1미리] 트로트 대부, 작곡가 박성훈

“이 실로폰이 바로 그 실로폰입니다. 제 분신이나 다름없죠.” 작곡가 박성훈씨가 20년 쓴 실로폰을 들어 보였다. 전국노래자랑의 대명사 ‘딩동댕’ ‘땡’ 소리가 여기서 나온다.
“이 실로폰이 바로 그 실로폰입니다. 제 분신이나 다름없죠.” 작곡가 박성훈씨가 20년 쓴 실로폰을 들어 보였다. 전국노래자랑의 대명사 ‘딩동댕’ ‘땡’ 소리가 여기서 나온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일요일 낮이면 어김없이 울리는 이 소리에 한국 사람이라면 몸부터 반응한다. 사회자 송해가 '전구~욱' 하고 선창하면 객석에서 엿가락처럼 길게 빼서 받는다. '노래자라~앙!' 1980년 시작해 40주년 맞은 KBS '전국노래자랑'의 시작이다. 이 멘트와 세트로 노래자랑을 여는 신호가 '딩동댕동댕~' 다섯 음계 실로폰 소리다. '딩동댕' '땡'. 온 국민 뇌리에 입력된 합격·불합격 음향도 실로폰 몫이다.

박성훈(69)씨는 심사위원으로 20년 동안 이 실로폰을 두드렸다. 역대 최장수 '딩동댕 아저씨'. 현철 '싫다 싫어', 나훈아 '고장 난 벽시계', 태진아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등을 만든 유명 트로트 작곡가다.

"요즘 나가면 얘깃거리가 두 가지밖에 없어요. '코로나19' '미스터트롯'. 우울한 세상에 트로트가 위안 주니 트로트 만드는 사람으로서 기운 나지요." 분신 같은 실로폰을 들고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 스튜디오에 박씨가 나타났다. '딩동댕동댕~.' 그가 실로폰을 두드리자 가림막 뒤에서 일하던 동료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이 소리가 그 소리인가요? 그럼 선생님이?" 마스크 쓴 채 박씨가 웃었다. "저는 경기도 의왕 백운호수 아래 있는 콩나물 공장 공장장 박성훈입니다." 음표를 재배하는 자신의 사무실을 '콩나물 공장'이라 불렀다.

'땡'의 타이밍

요새 그는 누구보다 흐뭇하다. 태풍급 트로트 인기를 몰고 온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출연자 상당수가 노래자랑에서 그의 심사를 받았다. 송가인·홍자·김소유처럼 직접 발굴해 가수로 데뷔시킨 경우도 있다.

―전국노래자랑 심사위원은 어떻게 맡았습니까.

"대대로 심사위원은 작곡가가 했어요. '고향역' 작곡가 임종수씨가 처음 했고, 정풍송·신대성씨가 뒤를 이었습니다. 저는 2000년 1월부터 했어요. 제일 오래했지요. 지금은 대여섯 명이 돌아가면서 하는데 저는 격주에 한 번꼴로 나갑니다."

―'땡'이 과거보다 줄었다던데요.

"초반에는 음정·박자 안 맞으면 칼같이 땡 했어요. 나이 드니 유해지는 건지 예전만큼 많이 주진 않습니다. 한 회에 한 명 정도? 1990년대 노래방이 보급되면서 확실히 실력이 좋아졌어요. 땡에도 기술이 필요해요."

―기술이라 하면?

"한창 절정에 있는데 땡 하면 상처받아요.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막걸리 한잔하고 해 지고 들어갔다는 사람도 있어요. 노인한테 야박하게 땡 할 수 있느냐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고, 땡 받은 아이가 서럽게 울어 녹화장이 엉망진창 되기도 해요."

―최근 일본 마이니치신문에서 한국 문화 관련 기사를 쓰면서 전국노래자랑을 언급했어요. "일본 노래자랑과 달리 한국은 관객도 의자에 서서 노래하고 춤춘다"면서 "춤추며 노래하는 공감의 마당"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맞아요. 뙤약볕 아래에서 같이 울고 웃지요. 노래자랑이 농촌 분들 응어리 풀어주고 답답함 달래주는 해방구 역할을 했다는 데 자부심 느낍니다."

주현미·송가인 발굴한 스타제조기

지난해 11월 KBS 2TV ‘불후의 명곡’에 ‘전설’로 출연한 모습. / KBS
지난해 11월 KBS 2TV ‘불후의 명곡’에 ‘전설’로 출연한 모습. / KBS

―송가인을 발굴했다고요?

"2010년 전국노래자랑 진도편에 송가인이 나와 최우수상을 탔어요. 제가 만든 주현미 '정말 좋았네'를 부르는데 한 소절만 들어도 알겠더군요. 1년 뒤 진도 출신 국악인 최우칠씨를 송해 선생님 사무실에서 만났어요. 송가인을 안다고 해서 한번 와보라고 전해달라 했습니다."

―왜 1년을 묵혔습니까.

"심사 끝나고 바로 오라고는 안 합니다. '가수 사냥' 하러 심사하는 게 아니니까. 한참 지나도 여운 남는 친구가 가끔 있어요. 송가인이 그랬습니다. 만나서 가정 형편을 물었더니 아버지는 농사짓고, 어머니는 씻김굿 한다고 합디다. 시골에서 부모님께 계속 손 벌리고 살 수 없으니 판을 내보라고 권했어요. 가수한테는 판이 운전면허증 같은 거라면서. 2012년 앨범 만들어 가수로 데뷔시켰지요."

홍자, 김소유도 제자다. "삼인삼색(三人三色). 송가인은 우리 옛 정통 트로트를 구성지게 부르고, 홍자는 발라드 트로트를 잘 부르죠. 김소유는 송가인처럼 정통 트로트 쪽인데 목소리가 약간 더 굵어요."

―미스터트롯 출연자와도 인연이 있습니까.

"김수찬, 이찬원, 임영웅, 정동원, 홍잠언 등 출연자 80~90% 정도가 전국노래자랑 출신이더라고요. 임영웅, 김수찬은 작업은 같이 안 했는데 사무실에 찾아온 적이 있어요. 안성훈은 판 만들어 송가인하고 같이 다니게 했고요. 홍잠언은 평창군 편에 나왔는데 꼬마가 어쩜 그리 잘하는지 눈에 띄었습니다. 정동원은 함양군 편에 출연했는데 색소폰까지 어찌나 간드러지게 불던지." 누가 눈에 들어오더냐고 묻자 "목소리로 따지면 이찬원, 임영웅이 잘하더라"고 했다.

―'망돌(망한 아이돌)'인데 전향했다는 친구 등 안 풀려 트로트의 길로 온 출연자가 많더군요. 실패와 도전기에 사람들이 감정이입합니다.

"실패가 있으니 한이 나오는 겁니다. 당장은 아이돌이 좋아 보일지 몰라도 길게 보면 이 길이 나을 수 있어요. 아이돌 댄스곡은 나이 들면 못해요. 트로트는 한번 알려지면 30~40년 할 수 있어요. 주현미씨도 30~40년 전 제가 목소리를 발굴했는데 지금까지 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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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곡요?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세월이 만들었어요. 세월에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쓴 곡이 900여곡. 박성훈씨는 다작(多作)은 자랑이 아니라며 몸을 낮췄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주현미 목소리를 발굴했다고요?

"1980년 초반 '오아시스 레코드' 문예담당으로 메들리 음반을 기획할 때였어요. 전 직장이었던 '아세아 레코드'에 갔다가 주현미씨가 녹음한 연습용 테이프를 우연히 들었어요. 목소리가 귀에 확 꽂히더군요. 그쪽 회사에선 큰 관심이 없어서 우리가 키우겠다고 했지요. 전자오르간 하나 가지고 뚝딱 만든 게 1984년 '쌍쌍파티'였어요."

주현미, 김준규가 참여해 '무정한 그 사람' '청춘고백' 등 과거 히트곡을 엮어 만든 메들리 앨범 '쌍쌍파티'는 우리 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대히트작이었다. 카세트테이프 시절 발매 즉시 '길보드 차트(길거리 노점상 인기 차트)' 점령. 하루 1만장 팔려나가기도 했다. 택시, 버스 안도 쌍쌍파티 물결이었다. "주현미씨가 약사로 필동에서 약국을 하고 있었어요. 제가 악보를 출력해 기타 메고 약국에 가서 노래 연습시키곤 했어요." 1985~1987년 주현미의 방송 매니저를 했다.

그가 뒷얘기를 들려줬다. "쌍쌍파티가 원래 '바다가 육지라면'을 부른 조미미씨를 메인으로 해서 만들려고 했는데 조미미씨가 펑크를 내 무명이던 주현미씨가 갑자기 대타가 됐습니다. 부랴부랴 전화해서 빨리 약국 문 닫고 오라고 해서 녹음했습니다." 그는 "야구 선수들이 조금 다쳐도 이를 악물고 나온다고 한다. 대타가 잘해 자리를 뺏길 수 있어서란다. 인생은 결국 타이밍이란 걸 깨달았다"고 했다.

50년 음악 동반자 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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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10여년 전 송해(왼쪽)와 찍은 사진. 인연이 오래됐지만 같이 찍은 사진은 몇 장 없다. 아래는 직접 발굴해 데뷔시킨 송가인과 함께. / 박성훈
경남 창녕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시절. 기타만이 고단한 삶을 달래줬다.

―음악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중학교 때 이웃집 형이 쓰던 하모니카를 30원 주고 샀어요. 소독한다면서 종일 물에 담가뒀죠(웃음). 고등학교 때 매형이 3700원 주고 기타를 사줬어요. 기타를 치다 보니 곡 흐름이 보였어요. 독학으로 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가수 현철을 만났다.

―현철씨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현철씨가 서울 올라가 음악 하다가 잘 안 풀려 1960년대 후반 부산으로 내려와 후진 양성을 했어요. 서울 물 먹은 분이니 뭔가 배울 게 있겠다 싶었어요. 1969년 습작한 곡을 들고 부산 범일동에 있던 현철씨 사무실에 무작정 찾아갔어요. 그때부터 50년 넘게 친형제처럼 지냈습니다."

현철의 사무실에 더부살이하며 기타교습소를 하다가 마산으로 교습소를 옮겼다. 1976년 작곡가로 데뷔했지만 첫 곡은 히트에 실패했다. 1979년 현철과 둘이 각자 문하생들을 모아 음반을 제작하기로 하고 서울의 한 녹음실을 찾았다. 녹음이 끝나고 대여 시간이 30~40분 남아 심심풀이로 작곡해둔 두 곡을 둘이서 같이 부르고 내려왔다. '사랑은 나비인가 봐'와 미국 가수 레이프 개릿의 인기곡 'I was made for dancing'을 번안한 '다 함께 춤을'이었다. 얼마 후 아세아 레코드 사장이 연락했다. "두 곡이 정말 좋아 판을 만들었는데 반응이 뜨거우니 방송에 한번 출연해 달라"고 했다.

―판이 나온 걸 나중에 안 건가요?

"레코드사에서 어디서 구했는지 색소폰 사진 크게 박아 앨범 재킷을 만들어 놨더군요. 사장님이 급조해 붙인 그룹 이름이 '벌떼들'이었어요." 결국 방송에 출연했는데 직후부터 판매가 뚝 떨어졌다.

―어찌 된 건가요.

"레이프 개릿 같은 20대 꽃미남 가수를 생각했는데 이거 원 하나는 완전 소 장수고, 하나는 비쩍 마른 갈비고. '비주얼 쇼크'였던 거지. 홍보가 아니라 테러였죠. 하하하." 게다가 판이 나온 건 1979년 여름. 몇 달 뒤 10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대통령 돌아가셨는데 무슨 춤을 추고, 나비처럼 날아와서 사랑을 심느냐고 했죠. 바로 금지곡이 됐습니다." 이후 박씨는 작곡에 전념하려고 서울로 올라왔고, 현철은 부산에서 정식으로 그룹 '현철과 벌떼들'을 만들었다. 첫 직장은 아세아 레코드. 1981년 오아시스 레코드로 옮겼다.

―몇 곡이나 만들었습니까.

"900여 곡. 그중 알려진 곡은 70곡 정도, 진짜 대박 난 노래는 20여 곡입니다. 작품 많이 한 거 절대 자랑이 아닙니다. 900곡 중 830곡 부른 가수들은 유성(流星)처럼 사장됐다는 얘기니까요. 쓰린 가슴 움켜잡고 고향으로 돌아간 무명 가수가 그렇게 많습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특별히 애착 가는 곡이 있나요.

"배부르고 여유 있을 땐 최고급 요리를 사준다고 해도 별 감흥이 없는데, 배고프고 힘들 땐 해장국 한 그릇도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현철 '사랑은 나비인가 봐'(1979년), 주현미 '첫정'(1986년), 하춘화 '날 버린 남자'(1990년). 세 곡이 제겐 힘들 때 먹은 해장국 같은 곡입니다. 30~40년 전 낳은 자식인데 아직도 효도하고 있어요."

―어떤 노래가 히트하던가요.

"곡이 좋다기보다 그 시대가 히트곡을 만들어 줍니다."

―트로트가 돌아왔습니다.

"1960년대 이미자·남진·나훈아, 1970년대 조용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엄청난 트로트 붐을 일으켰어요. 1980년대 주현미 '쌍쌍파티'로 확 떴다가 1990년대 현철·송대관·태진아·설운도 4인방이 전성기를 이끌었고요. 한동안 잠잠하다가 30년 만에 송가인이 나와 다시 지핀 겁니다."

―왜 인기일까요.

"한국 사람이 어쩌다 카레라이스 먹고, 스테이크 먹을 순 있어도 김치, 된장찌개 안 먹고 살 수는 없는 것과 같아요. 트로트는 한국 사람들 삶 그 자체입니다. 트로트 가수 대부분 빈손으로 고생한 사람들입니다. 설움이 배 있습니다. 미스트롯·미스터트롯이 이 설움을 토해낼 멍석을 깔아준 겁니다."

―트로트가 뜨니 저작권 수익도 커졌겠습니다(웃음).

"'항구의 남자' '고장 난 벽시계' 등을 많이 부르니 수익이 좀 늘었겠죠(웃음). 그런데 작곡가들이 '유행가 인기는 청춘보다 빨리 소멸한다'고 해요. 저작권료가 저작자 사후 70년간 나온다지만 진짜 명곡 몇 곡 빼곤 그렇게 오래 못 갑니다."

―트로트가 촌스럽다는 사람도 여전히 있어요.

"시골에서 부모님이 농사지어 서울로 대학 보내놨는데 서울 간 자식이 우리 부모님 촌스럽다면서 고생하며 뒷바라지한 걸 부정하면 안 되지요. 일제 강점기 때 '나그네 설움' '눈물 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 같은 노래가 우리를 위로했습니다. 이제 좀 먹고살 만하니까 그 노래들 촌스럽다고 하면 안 됩니다. 반야월 선생님이 '흘러간 옛 노래'가 아니라 '흘러온 옛 노래'라고 했어요. 흘러간 건 지나가버렸다는 얘기고, 흘러온 건 시간이 쌓여 내려왔다는 겁니다. 트로트가 그렇습니다."

'작곡계의 송해'를 꿈꾸다

작곡가로 산 세월이 44년, 심사위원석에 앉은 세월이 20년이다. "노래와 함께 인생을 관전한 세월"이라고 했다.

―심사, 작곡하면서 깨달은 인생의 지혜는 뭔가요.

"전국노래자랑 할 때 음정이 많이 이탈하면 어쩔 수 없이 땡을 칩니다. 가끔 송해 선생님이 출연자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는데 같은 부분에서 또 틀려요. 또 '땡'이지요. 송해 선생님이 '그래도 삼세 번은 해야지' 하면서 이번엔 박자 맞추며 거들어줘요. 그래도 또 틀립니다. '땡' 치지요. 그때 선생님이 말씀하십니다. '여보세요. 땡, 땡, 땡 세 개 합치면 딩동댕 아니잖소. 우리 인생도 그런 거야.' 인생도 끈기 있게 물고 늘어지면 언젠가 성공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는 "송해 선생님처럼만 살 수 있다면 성공한 삶 같다"고 했다. "참 대단하신 분입니다. 흥과 센스, 배려가 넘칩니다. 한말씀 한말씀 허튼 말씀이 없습니다. 조카뻘 저한테도 말씀을 안 놓습니다. 시간 한 번 어긴 적 없으시고요. 말씀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니 존경심이 절로 생깁니다."

―노래에 선생님 개인사도 담습니까.

머뭇거리다 홍잠언이 불러 재주목받고 있는 그의 노래 '남자의 항구' 한 구절로 대답을 대신했다. "묻지를 마라 남자의 사연을/ 묻지를 마라 첫사랑일랑~" 그는 "옛날 얘기하면 집사람이 신문 보고 나이가 일흔인데 아직도 사랑 타령인가 안 그러겠습니까. 하하하." 더 이상 이 남자의 사연을 묻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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