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같은 논객과 문인, 그 뒤엔 심지 굳은 경영자들… 조선일보 100년을 만든 33인

별 같은 논객과 문인, 그 뒤엔 심지 굳은 경영자들… 조선일보 100년을 만든 33인

조선일보
입력 2020.03.05 03:00 | 수정 2020.03.05 20:01

지난 100년 조선일보는 수많은 사람이 고뇌하고 땀 흘리며 만들었다. 그 가운데 세상을 떠난 대표적 인물을 논객·기자, 문인, 경영자로 나누어 살펴본다.

논객·기자로서 일제시기 조선일보를 대표하는 인물은 안재홍이다. 민족운동가이자 역사학자였던 그는 1924년부터 8년간 사설 980편, 시평 470편 등 무려 1450편의 글을 쏟아내면서 민족의 뜻을 대변했다.

역시 민족운동가였던 한기악은 1927년 초부터 신간회 운동의 기관지 역할을 했던 조선일보 편집국을 4년 동안 지휘했다. 국어학자 장지영은 1929년 조선일보가 대대적으로 펼친 문자보급운동을 주도했다. 역사학자 문일평은 1933년부터 7년간 역사 칼럼과 연재물을 통해 우리 역사의 대중화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민간지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는 두둑한 배짱으로 사회부에서 맹렬한 활동을 펼쳤다. 주요한은 조선일보가 경영난으로 흔들리던 1932년 9월부터 1년간 편집국장으로 부활의 여정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다.

광복 후 조선일보에도 기라성 같은 논객·기자들이 있었다. 다방면에 해박해서 '홍박(洪博)'으로 불린 홍종인은 대한민국 출범 직후인 1948년 말부터 10년간 논설을 책임졌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설을 쓴 최석채는 국제언론인협회(IPI)가 선정한 '20세기 언론 자유 영웅'에 한국 언론인으로 유일하게 선정됐다. 선우휘는 윤전기를 세우고 사설을 갈아 끼우는 등 많은 일화를 남겼고, 첫 기명 칼럼의 주인공이 됐다. 이규태는 수많은 한국학 관련 기획을 연재했으며 '이규태 코너'는 6702회라는 한국 언론 사상 최장기 기록을 세웠다.

20세기를 조선일보와 함께한 문인으로는 박종화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창간 초기 기자로 근무했고, 광복 후에는 '임진왜란' '세종대왕' 등 장편 역사소설을 잇달아 연재했다. 현진건은 1920년 말 입사해 러시아 소설을 번역 연재했고, 사회부장 시절에는 제목을 잘 뽑는 명편집자였다.

염상섭은 학예부장 시절인 1931년 대표작 '삼대'를 연재했다. 민족 시인 이육사는 1931년 8월부터 대구지국 기자로 일했고, 조선일보를 떠난 뒤에도 많은 글을 기고했다. 이광수는 1933년 8월 입사해 부사장·편집국장·학예부장 등 다섯 직책을 한꺼번에 맡았고 소설 '유정' '이차돈의 사(死)'를 연재했다. 사회부 기자였던 채만식은 재직 중에는 소설을 한 편도 쓰지 못했지만 퇴사 후인 1937년 대표작 '탁류'를 연재했다.

시조 시인 이은상은 출판부 주간으로 '조광' 등 잡지 발간을 총괄했고 민족문화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아동문학가 윤석중은 소년조선일보 편집을 맡았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은 영화 담당 기자였고, 모더니즘 시인 겸 문학평론가 김기림은 1930년 공채 1기 기자로 들어와 강제 폐간 때까지 근무했다. '모던 보이' 미남 시인 백석은 잡지 '여성'을 만들면서 조선일보에 시와 번역물을 실었다. 시 '사슴'의 작가 노천명도 출판부 기자였다.

조선일보는 외부의 저명한 문인들이 대표작을 발표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일제시기에는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 한용운의 소설 '흑풍' '박명'이 절찬리에 연재됐다. 1970년대 혜성처럼 문단에 나타난 최인호는 소설 '별들의 고향' '잃어버린 왕국'으로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

논객·기자와 문인이 조선일보 지면을 빛낸 것은 그들을 뒷받침한 심지 굳고 유능한 신문 경영자들이 있었던 덕분이다. 한말 민족지 황성신문의 사장을 지낸 남궁훈은 1921년 4월 제3대 사장으로 초빙된 후 '보도 제일주의'를 내걸고 상하이 임시정부와 소작쟁의 기사를 싣는 등 과감한 지면 제작으로 발행 부수를 3000부에서 1만5000부로 끌어올렸다. 1924년 9월 민족운동가 신석우가 동지들과 함께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한 뒤에는 '민족의 사표(師表)'로 존경받던 이상재가 제4대 사장으로 '조선 민중의 신문'으로 거듭난 조선일보의 정신적 중심이 됐다.

1927년 3월 제5대 사장이 된 신석우가 물려받은 집안 재산을 다 쏟아붓고 1931년 7월 물러난 후 표류하던 조선일보의 정상화를 자임한 인물은 민족운동가 조병옥이었다. 그는 민족 지도자 조만식을 제8대 사장으로 영입하고 조선일보 부활을 위해 함께 애썼다. 하지만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어려워지자 민족을 위해 헌신할 새 사주(社主)를 물색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평안도의 '금광왕' 방응모가 조만식 등의 설득을 받아들여 1933년 3월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그해 7월 제9대 사장이 된 방응모는 경성 한복판에 웅장한 사옥을 짓고 취재용 비행기를 구입하는 등 과감한 투자로 조선일보의 중흥을 이끌었다.

이후 20년 가까이 조선일보를 책임지던 방응모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 납북되자 선장 잃은 조선일보를 지탱하는 역할은 방응모의 장손 방일영에게 맡겨졌다. 27세에 갑자기 경영 책임을 지게 된 그는 전시판 제작을 지휘하는 등 전력을 기울여 조선일보 발전의 새 토대를 놓았다. 그리고 그의 동생 방우영이 1964년 11월 뒤를 이어 대표로 취임해 '정상(頂上) 조선일보'를 향한 발걸음을 계속했다.
/이선민 선임기자

초인종 의인, 400억 기부한 부부… 본지가 알린 선한 사람들, 더 큰 선행의 씨앗 되다


포격당한 연평도 주민에게 찜질방 내준 부부
제자들 수학여행비 모으려 597㎞ 걸은 교사
안산 중학생들에게 교복 지원한 장례식장 대표…
또 다른 선행을 낳는 '선한 영향력'으로 작용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집을 떠나야 했던 주민 수백명에게 숙소를 제공한 찜질방 주인 부부부터 수학여행비가 모자라는 제자들을 위해 국토를 종단한 시골분교 교사까지. 지난 100년간 조선일보는 이웃을 위해 말없이 희생하고 봉사했던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러 차례 발굴해 세상에 알렸다. 이들의 이야기는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크고 작은 다른 선행(善行)을 낳는 '선한 영향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국가 대신 피란민 품었던 찜질방 부부
"힘들었지만, 후회는 안 합니다." 2010년 11월을 회상하는 박운규(65)·서기숙(60)씨 부부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북한의 포격으로 쑥대밭이 된 연평도에서 빠져나온 주민 700여 명에게 부부는 자신들이 운영하던 인천의 찜질방 '인스파월드'를 1개월간 숙소로 제공했다.〈본지 2010년 11월 29일 자 A10면>
박운규·서기숙씨 부부 (2010년 11월 29일자 A 10면)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피해 주민 700여 명에게 한 달여간 자신들이 운영하는 찜질방을 숙소로 제공

십 수년 정성껏 키워온 사업장을 '피난처'로 내놓은 대가는 혹독했다. 한 달 남짓한 기간 찜질방 회원이 1500명에서 500여 명으로 줄고 시설도 망가졌다. 결국 2014년 초 폐업했고, 부부는 동시에 신용 불량자가 됐다.

박씨 부부는 "그래도 좌절하지 않았다"며 "조선일보 보도를 보고 우리 사연을 알게 된 주위 이웃들이 응원과 격려 메시지를 수없이 보내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가의 일을 개인이 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등 편지가 쏟아졌다.

선행을 하려다 '사장님'에서 '계약직 근로자'가 됐지만, 부부의 선행은 계속되고 있었다. 한 달 1만~5만원씩 국내 저소득층 어린이 성금으로 보낸다. 부부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남을 도울 기회는 공평하잖아요"라고 했다.

◇소화기로 부활한 '초인종 의인'
2016년 9월 9일 새벽. 불길이 타오르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원룸 건물에 20대 청년이 뛰어들었다. 이 건물 거주자였던 청년은 불이 나자 밖으로 먼저 피했다가 잠든 이웃들 걱정에 불길 속으로 되돌아갔고, 집마다 초인종을 누르며 대피 신호를 보내다가 건물 안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초인종 소리를 들은 주민 16명이 목숨을 건졌다. '초인종 의인(義人)' 고(故) 안치범씨다.〈본지 2016년 9월 21일 자 A1면

고(故) 안치범씨 (2016년 9월 21일자 A1면) 2016년 불이 난 원룸 건물에 뛰어들어 잠든 이웃집 초인종을 눌러 깨운 뒤 본인은 4층에서 질식해 숨진 '초인종 의인'(義人)

안씨가 숨진 다음 날 사회적 기업 쉐어앤케어는 그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안치범 소화기'를 제작하기 위해 모금을 시작했다. 16일 만에 1000만원이 모였고, 여기에 마포구청이 돈을 보태 '안치범 소화기' 1500개가 1인 가구 청년들에게 전달됐다. 작년에는 초인종을 누르는 안씨 손이 그려진 '야광 소화기'도 등장했다. 화상(火傷) 환자 지원 재단과 소셜벤처 회사가 기획·제작했고, 판매 수익금 전액을 화상 환자 치료에 쓰기로 했다.

◇세월호 학생 장례식장 사장님의 선물
"교복 입을 아이들에게 수의를 입히며 많이 울었죠." 경기도 안산의 안산제일장례식장 박일도(65) 대표는 2014년 세월호 참사로 숨진 학생 50명의 장례를 치렀다. 그 후에도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눈에 밟혔던 박 대표는 이듬해부터 매년 안산시내 가난한 중학교 신입생 100여 명에게 '생애 첫 교복'을 선물했다.〈본지 2016년 12월 21일 자 A12면> 작년엔 교복 대신 불우 여학생 생리대 구매 비용으로 1억여원을 기부했다.

박일도 안산제일장례식장 대표 (2016년 12월 21일자 A12면) 2014~18년 안산시 중학생들에게 교복 500여벌 지원, 2019년엔 생리대 구매 비용으로 1억 150만원 기부

박 대표의 행동은 업계에 선행(善行) 바람을 불러왔다. 부산전문장례식장, 군산은파장례문화원 등이 박 대표를 이어 지역 학생 돕기에 동참, 쌀과 생필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박씨는 2016년 한국장례협회장을 맡았다. 그 자리에서 세월호 참사와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경험을 토대로, 정부에 '지역별 국가 재난 대비 지정 장례식장' 설치를 건의했다. 올해까지 설치된 재난 대비 장례식장은 전국 195곳이다.

◇과일 장수 출신 노부부의 400억 기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사는 김영석(93)·양영애(85)씨 부부는 지난 2018년 10월, 평생 어렵게 모은 40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고려대에 기부했다.〈본지 2018년 10월 26일 자 A1면>

양영애 김영석씨 부부 (2018년 10월 26일자 A1면) 2018년, 식모살이 리어카 과일 장사 등 평생 고생하며 모은 시가 40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고려대 재단에 기부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이 부부는 평생 식모살이, 리어카 장사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렇게 번 돈으로 건물을 사 모았고, 그걸 사회에 되돌려줬다. 양씨는 "못 배우고 없는 사람도 사회를 위해 기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재산 기부 약정을 하러 고려대에 가던 날 부부의 점심 상차림은 김치, 콩나물 무침, 고추장아찌 등 반찬 세 가지였다. 고려대를 비롯한 전국 학생들이 본지 보도를 접하고 부부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편지 수십 통엔 '열심히 공부하고 성장하겠습니다' '어려움에 좌절하지 않을게요' 같은 내용이 담겼다. 양씨는 "학생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것 같아 기쁘다"고 했다.

◇제자들 꿈 위해 땡볕에 597㎞를 걷다
2005년 한여름, 경북 포항 기계중 상옥분교 체육 교사 최인호(당시 50)씨가 제자들 수학여행 교통비를 모으려고 부산에서 강원 고성까지 597㎞를 보름간 걸어갔다. 본지 2005년 7월 21일 자 A9면> 작열하는 태양에 다리는 화상을 입었다.

최인호 전 포항기계중 상옥분교 교사 (2005년 7월 21일자 A9면) 2005년 제자 13명 수학여행 교통비를 모으기 위해 부산에서 강원 고성까지 597km를 보름간 도보 종단

그해 초 산골 분교 전교생 13명은 회의를 거쳐 낙조(落照) 감상과 갯벌·녹차밭 구경 등을 '희망 수학여행 일정'으로 정했다. 하지만 버스 대절료 '120만원' 등 여행 경비는 시골 학생 13명이 나눠서 부담하기엔 너무 컸다. 최 교사는 자신의 트레킹 동호회 인터넷 카페에 아이들의 꿈을 이뤄달라는 글을 올려 자신의 발걸음 10㎞당 1만원씩 모금하는 십시일반(十匙一飯)을 택했다. 사연이 본지를 통해 전해지자 전국에서 격려 전화와 계좌 번호 문의 전화가 300통 이상 쏟아졌다.

선행은 더 큰 선행으로 이어졌다. 2015년 네팔 대지진이 나자 최씨 인터넷 카페 회원들은 '2005년 그때'를 떠올리며 1000만원을 모금했다. 이듬해엔 3000만원을 모아 네팔 포카라 지역 빈민촌에 학생 기숙사를 지어줬다. 박씨는 "15년 전 내 작은 발걸음이 조선일보 덕에 큰 관심을 받으면서, 사람들에게 선행의 기쁨을 알린 것 같아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안영·이기우·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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