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에 本紙 신춘문예로 등단… 백석은 광화문의 멋쟁이 기자

입력 2020.02.27 03:00 | 수정 2020.02.27 07:18

[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13] 백석, 기자에서 문학스타로

일본 유학 후 조선일보에 입사해 기자로 일하며 작가 활동 병행
재직 중 1936년 첫 시집 '사슴'내… "세련된 언어로 모더니티 품어"
90년대 전집 나오며 전성기 누려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재직하며 찍은 사진. 이후 조선일보에 재입사해 열정적으로 창작 활동을 하며 시인으로서 전성기를 보냈다.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재직하며 찍은 사진. 이후 조선일보에 재입사해 열정적으로 창작 활동을 하며 시인으로서 전성기를 보냈다. /서정시학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한국인의 애송시로 꼽히는 시 '국수'를 쓴 시인 백석(본명 백기행)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산소학교와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듬해(1930년) 18세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했다. 당선작은 농촌에서 일어난 남녀의 불륜을 공동체의 소문 형식으로 그려낸 '그 모(母)와 아들'. 조숙한 솜씨로 인간 욕망을 다뤄 눈길을 끌었다.

조선일보와의 인연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춘문예 당선 직후 조선일보 장학생에 뽑혀 일본 아오아먀(靑山) 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유학을 마친 뒤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을 만났다. "내 옆에서 일하는 게 어떤가" 하는 방 사장 제안에 백석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시골 학교 영어 교사가 돼 시를 쓰면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방 사장은 "자네는 펜을 잡고 살아갈 사람이 아닌가. 기사를 쓰는 일이 자네가 하고 싶어 하는 글과 멀리 있지 않으니 잘 생각해보게"라고 재차 권했다. 결국 백석은 1934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교정부에서 근무했다. 신문에 인도 시인 타고르를 비롯한 외국 문인들의 수필을 번역해 싣고, 두 편의 단편소설을 연재했다.

◇결벽증 심한 멋쟁이 기자

백석은 신문사에서 결벽증이 심한 멋쟁이로 통했다. 남들이 20~30전짜리 양말을 신을 때 1원 넘는 양말을 고집했다. 지저분한 식당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전화를 받을 땐 손수건으로 수화기를 감싸서 통화했다. 주변에서 힐난의 눈치를 보내면 "여러 사람의 손과 입김이 닿은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대꾸했다. "얼굴색은 필리핀 사람처럼 거무스레했는데, 헤어스타일은 여간한 모던 보이가 아니었다"고 문학평론가 백철은 나중에 쓴 글 '1930년대의 문단'에서 회상했다.

백석은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해 드디어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출판부로 자리를 옮겨 잡지 '조광' 창간에 참여해 발간 1주일 만에 3만부 매진되는 성공을 거뒀다. 백석은 '조광' 창간호에 수필 '마포'를 발표했다. '여의도에 비행기가 뜨는 날, 먼 시골 고당의 배가 들어서는 때가 있다. 돗대 꼭두마리의 파랑개비를 바라보든 버릇으로 뱃사람들은 비행기를 쳐다본다'며 당시 풍경을 섬세하게 재현한 글이다. 잡지 편집자로 인정받은 백석은 '조광'에 이어 '여성' 창간 작업에도 투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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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은 조선일보 장학회인 ‘서중회’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1933년 백석(왼쪽에서 넷째)이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을 만나 찍은 사진(왼쪽). 백석은 조선일보를 잠시 사직하고 함흥 영생고보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가운데). 문예반 지도 교사로 학생들과 찍은 사진이 1937년 영생고보 교지에 실렸다.

백석은 틈틈이 쓴 시를 모아 1936년 첫 시집 '사슴'을 출간한다. 당시 시인과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를 지내던 김기림이 조선일보에 서평을 실었다. "'사슴'의 세계는 그 시인의 기억 속에 쭈그리고 있는 동화와 전설의 나라"라면서도 "주착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고 호평했다. 오늘날 백석이 케케묵은 향토 시인에 머물지 않고 참신하고 세련된 언어 감각의 시인으로 주목받는 까닭을 일찌감치 알아봤다.

◇90년대 들어 '백석의 시대'로

백석은 1939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만주 일대를 떠돌아다녔다. 해방을 맞아 귀향한 뒤 조만식의 비서를 지내다 6·25 때 북한에 머물렀다. 1950년대 초만 해도 북한 문예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러시아 문학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아동문학 창작과 평론에도 몰두했다. 하지만 1958년 김일성 정권의 문예정책에 어긋난 발언으로 자아비판을 강요당한 뒤 양강도로 추방됐다.

대한민국에서 그는 월북 시인으로 규정돼 출판 금지 대상이 됐다가 1988년 납·월북 작가 해금 조치 덕분에 문학사에 복귀했다. 해금 조치 후 시인 정지용에게 밀려 한동안 주목받지 못했지만 90년대 이후 '백석 전집'이 쏟아져 나오고 비평 활동이 활발해지자 '백석의 시대'가 열렸다. 최동호 고려대 명예교수는 "백석의 시는 한용운·김소월과 다르고 정지용·이상과도 다른 독특한 문학 세계"라며 "평이하게 쓰여진 것 같지만 범상한 수법이 아니며 고전적인 것 같지만 현대적인 놀라운 시적 역량을 보여준다"고 했다. 백석은 유배지 양강도에서 몇몇 시를 발표했지만, 1962년 이후 작품 활동을 금지당한 채 살다가 199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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