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동안 보고 또 보는 명작" 만화는 짧지만 여운은 길다

조선일보
입력 2020.02.19 03:00

5년째 댓글 달리는 웹툰 '오민혁 단편선'으로 출간
"웹툰 시장서 희귀한 사례? 짧고 굵은 게 좋았을 뿐"

오민혁
◇기(起)= 만화 판에 뛰어들었지만, 한 편도 완성하지 못했다. "2년 넘게 머리 싸매도 성에 안 찼다. 완벽주의 탓이었다." 2015년, 입대하는 친구 배웅하러 논산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툭, 차창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또 한 방울. "바둑알 같았다. 어깨에 힘 못 빼는 나와 한판 겨루려는 것 같았다." 그 길로 곧장 단편 만화 '화점(花點)'을 그려 인터넷에 올렸다. 승리에만 집착하는 프로 기사가 죽은 스승의 집에 들렀다가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방울과 바둑을 두며 잊고 있던 대국(對局)의 의미를 깨닫는다. 며칠 만에 네이버 웹툰에서 정식 연재 요청이 왔다. '오민혁 단편선'의 탄생이었다.

◇승(承)= 단 5편으로 이뤄진 단편선만 남기고 사라졌던 오민혁(32·작은 사진)씨가 돌아왔다. 5년이 지나도 "생각나 또 보러 왔다" 같은 댓글이 달리는 호응이 종이책 출간으로 이어진 까닭이다. 웹툰 시장에서 단편선은 희귀한 현상이다. 기승전결의 완결성을 갖춘 한 편의 스토리를 매주 짜는 것도 어렵고, 수익성이 낮아 시도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씨는 "짧고 굵은 게 좋다"고 말했다. "평소 좋아하던 일본 만화의 영향으로 고교 졸업 후 일본에 갔다. 대학에서 웹디자인을 배웠으나 1년 만에 그만뒀다. 좋아하는 걸 하기로 마음먹고 군대에 갔다. 낮에는 삽질하고 밤에는 만화를 그렸다." 제대해 입시미술학원 등을 다니다 스물여섯 늦깎이로 만화학과에 들어갔지만 그마저 1년 만에 그만뒀다. "하고 싶은 얘기를 하려면 잔가지는 쳐내야 한다." 단행본은 출간 직후인 지난 7일, 알라딘서점 만화 부문 1위에 올랐다.

단편만화 '화점'의 천재 바둑 기사 주인공은 죽은 옛 스승의 집에 들렀다가 떨어지는 빗방울과 가상의 대국을 벌이며 '바둑은 혼자 두는 게 아니다'라고 타이르던 스승의 참뜻을 깨닫는다.
단편만화 '화점'의 천재 바둑 기사 주인공은 죽은 옛 스승의 집에 들렀다가 떨어지는 빗방울과 가상의 대국을 벌이며 "바둑은 혼자 두는 게 아니다"라고 타이르던 스승의 참뜻을 깨닫는다. /유어마나

◇전(轉)= 그의 단편은 100컷 내외지만, 여운은 장편 영화와 비슷하다. "자전적인 요소가 많다"고 했다. 왼손잡이인 작가의 특징까지 주인공에게 주입한 '화점'이 그렇고, 나란히 누워 구름을 올려다보며 아이스크림의 맛을 상상하던 가난한 두 친구가 남북한의 공군이 돼 구름 속에서 조우하는 '아이스크림' 역시 뚝방길에서 친구들과 누워 잡담하던 추억에서 태어났다. 그의 무기는 강력한 반전과 성찰의 여운. 단편 '매듭'은 애인에게 버림받고 극도의 고독 속에서 사람들과 '연결'되고자 하는 어느 우주비행사의 강렬한 열망을 담고 있다. 이윽고 그는 실험 중이던 바이러스를 자신과 동료들에게 투입해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진다. "진로가 늦다 보니 주로 혼자 생활했다. 외로운 시기가 길었다. 그러자 외로움에 대해 그리고 싶어졌다." 미발표 신작 '우주어'는 단편선을 마치고 겪은 극심한 슬럼프 당시 그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딸을 잃은 어느 축구 선수의 아름다운 슬럼프에 대해 그려낸다.

◇결(結)= 올해 말 대형 플랫폼에 장편 연재가 예정돼 있다. "처음 만화를 그릴 때 2년간 머리 싸매던 그 작품이다." 장편이지만 단편 같은 장편이 될 전망. "6개월, 길어도 1년 안에 완결 내겠다. 늘어지는 건 싫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