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이 홍어 삼합과 김밥의 차이를 알아?"

조선일보
  • 이용재 음식평론가
입력 2020.02.15 03:00

[아무튼, 주말- 이용재의 필름위의만찬]

19. '비밀은 없다'와 김밥·전라도밥상

연홍(손예진 분)은 국회의원에 출마한 남편(김주혁 분)의 선거운동원들과 취재기자들에게 먹이기 위해 싼 김밥 한 점을 등교하는 딸(신지훈 분) 입에 넣어준다. 김밥은 연홍이 딸에게 먹인 마지막 음식이 된다. 딸의 죽음이 남편 때문임을 알게 된 연홍은 남편이 출마한 지역에서 사실 그 자체만으로 문제가 된다는 전라도 음식으로 남편 밥상을 차린다. 복수를 마친 연홍은 딸의 아지트였던 찔레꽃 언덕을 찾아간다. 거기에는 딸이 좋아했던 과자가 을씨년스럽게 널려 있다. /영화 화면
연홍(손예진 분)은 국회의원에 출마한 남편(김주혁 분)의 선거운동원들과 취재기자들에게 먹이기 위해 싼 김밥 한 점을 등교하는 딸(신지훈 분) 입에 넣어준다. 김밥은 연홍이 딸에게 먹인 마지막 음식이 된다. 딸의 죽음이 남편 때문임을 알게 된 연홍은 남편이 출마한 지역에서 사실 그 자체만으로 문제가 된다는 전라도 음식으로 남편 밥상을 차린다. 복수를 마친 연홍은 딸의 아지트였던 찔레꽃 언덕을 찾아간다. 거기에는 딸이 좋아했던 과자가 을씨년스럽게 널려 있다. /영화 화면
※주인공 연홍(손예진 분)의 시점에서 1인칭으로 영화 내용을 재구성해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모님 고향이 진짜 전라도예요?"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터무니없는 질문이나 받는 동네까지 와서 살게 된 걸까? 다 남편 때문이지. 방송국 앵커였던 남편은 고향에서 국회의원 공천을 받았어. 터줏대감인 현역 4선 의원을 제치고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라는 당의 새 얼굴로. 공천만 받으면 게임 끝이어서 선거 운동도 많이 하지 않는다는 지역, 그러니 4선이나 해먹었던 터줏대감이 곱게 물러날 리 없지. 무소속 출마야 당연한 수순이니 이해가 되는데, 요즘 같은 세상에 내 고향까지 물고 늘어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런 것도 같다. 그런 인간과 16년이나 함께 일했다가 남편을 쫓아 넘어왔다는 당 사람들을 보면 이상할 게 하나도 없어. 내 고향 이야기를 서슴없이 물어본 장본인도 바로 밑에서 일했다는 보좌관인가 하는 인간이니까. "진짜입니까? 고향이 전라도입니까? 그럼요, 그런 게 문제가 되죠, 여기에서는." 이런 인간들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음식을 만들어 내놓으려니 갑갑한데, 그것도 하필 김밥이라니 속이 터져버릴 노릇이네. 선거 운동원이니 기자니, 이런 시기에 잘 챙겨줘야 할 입들에게 김밥보다 나은 음식이 없긴 하지.

다 잘 알겠는데 그러니까 더더욱 답답해. 굳이 김밥 같은 걸 집에서 손으로 싸서 내놓을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은박지에 싸거나 스티로폼 도시락에 담을 것,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고 내놓았더라면 아무도 산 건지 손수 만든 건지 구분 못 할 텐데. 우리 집에 와 있는 징글징글한 인간들, 사실은 남편조차도 구분할 능력 같은 건 없을 텐데.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신예 정치인의 아내가 보여줘야만 할 것이 있을 테니까. 사람들이 '내조'라 부르는 것들 있잖아. 남편이 빛나는데 보탬이 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그래서 김밥 같은 음식도 함부로 사다 내서는 안 돼. 내조 형편없다고 말이 나올 테니까. 게다가 이미 상대방이 내 고향을 가지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으니까. 자칫 잘못하면 '저 동네 사람이라 그런 건가'라는 말까지 나오겠지.

칼이 아무리 잘 들어도 김밥 썰기는 어려워. 밥알의 전분이 날에 들러붙어 끈적끈적해지니까. 그래서 몇 줄에 한 번씩은 꼭 날을 닦아 줘야만 해. 칼날에 들러붙는 김밥처럼 마음이 아주 개운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한 개를 딸애의 입에 넣어줘. 아직 중학생인데 탈선을 좀 해서 나도 골치가 아팠고 남편의 정치 도전에도 보탬이 안 되는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래도 어떡해, 내 딸인데. 남편 따라 외국 생활을 해서 적응을 못 하는 걸까? 하여간 김밥 한 쪽 넣어준 입으로 오늘은 늦는다고 말하네. 자혜라는 친구와 미술 조(組)작업 준비를 늦게까지 한다며.

그런데 아이는 그날 밤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 알고 보니 자혜라는 친구도 존재하지 않았더라고. 다음 날, 그 다음 날에도. 진작 실종 신고를 하자고 남편에게 이야기했지만 다들 좀 더 두고 보자고 만류해. 선거운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지. 나는 나대로 미칠 것 같아. 아이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미쳐버릴 노릇이지만 하필 마지막으로 먹인 음식이 김밥이었으니까. 그냥 가족끼리 먹겠다고 몇 줄 싼 김밥도 아니고 아이의 소풍 점심으로 따로 싼 김밥도 아닌, 누군지도 관심 없는데 내 고향이나 붙들고 늘어지는 복마전의 승냥이 같은 인간들을 위한 김밥이었으니까. 사서 먹여도 충분히 문제가 없을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싼, 사실은 마음 없는 김밥이었으니까.

김밥·전라도밥상
결국 실종 신고를 했지만 아이는 며칠 뒤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됐어. 무슨 정신으로 이렇게 아이의 죽음을 말할 수 있느냐고? 사실은 나도 몰라. 정치판은 복마전이라고 그랬지. 그 한가운데서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것만으로 이미 미쳐버릴 것 같은데, 이제 아이도 죽었고 혼자 덩그러니 남았어. 누구라도 정신을 추스를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이대로 미쳐버릴 수는 없잖아. 딸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아야지. 안 읽은 이메일이 5만통 넘게 쌓인 메일함까지 샅샅이 확인하며 나는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 알고 보니 아이는 왕따였고, 유일하게 통하는 친구 미옥이와 학교생활을 버티다가 누구도 아닌 남편의 불륜을 발견해. 일일교사로 아이 학교에 방문했다가 미술 교사와 눈이 맞은 거야. 아이와 친구는 불륜 현장의 증거를 확보해서 교사를 집요하게 압박해왔어. 교사는 남편에게 이런 사실을 털어놓지만 압박의 장본인이 누구인지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 그래서 결국….

이렇게 보름이 지나고 선거일 아침, 나는 아침 밥상을 차려. 대체 몇 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시작했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이제 그런 것은 기억도 나지 않고 어차피 중요하지도 않아. 밤을 뜬눈으로 새웠던 것도 같아. 하여간 그냥 밥상도 아닌, 나의 밥상을 차린다. 금풍생이(군평선이) 구이부터 낙지 호롱이, 홍어 삼합까지, 여기에서는 그냥 사실 자체만으로 문제가 된다는 전라도 음식으로 차린 밥상. 아마도 그때가 딸아이와 보내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김밥 따위 대신 차려 주었을 밥상. 그런 밥상 앞에서 내가 선거의 승리를 기원해주자 남편은 밥을 입에 넣으며 눈물을 흘린다. 그때는 전혀 몰랐겠지, 아직 흘릴 눈물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복수는 끝났어. 남편은 자신의 사주로 죽은 이가 누구도 아닌 딸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불륜의 증거는 자신이 방금 꺾은 4선 터줏대감의 홈페이지에 올라갔지. 이제 곧 널리 퍼질 테고 남편은 그렇게 끝이야. 아이의 아지트였던 찔레꽃 언덕을 다시 찾아오니 살아있을 때 좋아했던 과자들이 초라하게 널려 있어. 미옥이가 가져다 놓은 것이겠지. "우리 딸이 지 엄마는 좋다 하디?" 엉엉 울며 나타난 미옥을 부둥켜안고 물어보았어. "멍청하다고 그랬어요. 엄마는 멍청하다고. 그래서 지가 지켜줘야 된다고 그랬어요."

얘, 내가 김밥도 잔뜩 쌌고 고향 음식도 한 상 가득 차렸지만 네가 여기 가져다 놓은 이 초라한 과자들이 진짜 음식이야. 내 음식에는 처음부터 마음이 하나도 없었거든.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