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21세기 손오공들

조선일보
  •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
입력 2020.02.14 03:00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
'축지법과 비행술로 인생이 바뀌었어요!'

몇 년 전 서울 합정역 근처 건물에 붙어 있던 실제 간판 문구다. 이른바 축지법과 비행술을 가르친다는 정체불명 학원이 내건 이 간판은 간혹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의 빈축을 사곤 했으나 최근에는 아예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 대부분 사람이 유사 축지법과 비행술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출귀몰하다는 홍길동이나 손오공, 득도한 도사 정도는 돼야 터득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기술들은 통상 보통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던 능력이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걸어야 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양태는 달라도 두 기술의 공통점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이 몸에 각인해야만 했던 지세(地勢)를 초월하려는 염원을 담고 있으며, 그 염원을 통한 좀 더 나은 삶의 바람을 투영하고 있다.

나는 최근 직장을 옮기면서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서울~부산은 천리 길이니 과거에는 꼬박 열흘 이상 걸어야 하는 길이었겠지만, 이제는 현대판 축지법과 비행술을 통해 2~3시간이면 오르내리는 거리다. 문명의 이기는 '신체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며 살았던지라 "서울에서 부산이면 조금 먼 이사 정도 아니겠나" 생각하고 그다지 큰 고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이사한 후 깨닫게 된 것은 몸이 현대판 축지법과 비행술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나는 더 바쁘게 신출귀몰해져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한 달에도 몇 번씩 서울과 부산을 오르내리며 과거 사람들이 꿈꾼 삶이 지금의 내가 운영하고 있는 삶인가 생각한다. 축지법과 비행술을 터득함으로써 생겨난 시간을 또 다른 축지법과 비행술을 개발하는 용도 외에 사용하지 못하는 삶이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걸었던 시대보다 넉넉해진 삶인지 자문한다. 오늘도 열차에 앉았다. 축지법에 몸을 맡긴 또 다른 손오공들을 바라보며 축지법이 없던 시대에 꿈꾼 변화된 삶을 되새김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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