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語西話] 다리 밑에서 하룻밤을 묵다

조선일보
  • 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20.02.14 03:12

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옛 우리 문헌에 의하면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5일) 달밤 청계천의 광통교·수표교 등에는 한양 도성의 청춘 남녀가 몰려나와 다리밟기 인파로 가득했다고 한다. 오늘 다리[橋]를 밟으면 일년 내내 다리[脚]가 건강해진다는 세시풍속을 따른 것이다. 명분이야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선남선녀를 이어주는 자연스러운 기회 제공이라는 실리가 한몫했다. '썸을 타고' 이어서 올드 팝송 가사처럼 "그대 위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그대를 지키리"라는 약속을 다짐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사실 다리는 이어주기가 목적이다. 베트남 다낭에서 멀지 않은 호이안 세계문화유산 마을에서 내원교(來遠橋)를 만났다. 돌기둥 위에 목재로 상판을 만들고 기와로 지붕을 올린 길이가 20m가량 되는 누마루형 다리다. 서로 껄끄럽게 지내던 일본인 거주지와 중국인 거주지를 이어주기 위해 1593년 건설했다고 한다. 오랜 역사를 가진 국제적인 무역항답게 거주민의 안녕은 물론 배를 타고 오가는 먼 나라 사람들의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사당까지 함께 건립했다. 다리를 통해 양쪽을 오가는 일본·중국·월남 사람뿐만 아니라 바다를 건너가는 외국 사람까지 연결한 것이다.

만들어진 다리는 늘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이용하는 사람은 지나갈 때만 잠깐 편리함을 누리는 순간의 공간이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다리 밑에서 오래 머물러야 한다면 그 당사자는 사실 '좋은 상태'가 아닌 것이다. 당나라 현종 시절에 장계(張繼)는 과거에 낙방한 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리 곁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 참담한 심경을 '풍교야박(楓橋夜泊·풍교 곁에서 밤을 새우다)'이라는 글로 남겼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달이 지니 까마귀 울고 하늘 가득히 서리 내리는데(月落烏啼霜滿天)/강가의 단풍과 고깃배 불빛을 바라보며 시름 속에서 잠을 청하는구나(江楓漁火對愁眠)/고소성 밖 한산사에서(姑蘇城外寒山寺)/한밤중에 울리는 종소리는 나그네가 묵고 있는 뱃전까지 들려오네(夜半鍾聲到客船)

이 시는 과거 급제에 올인해야 하는 동아시아의 수많은 고시생 젊은이에게 공감과 함께 위로를 주었다. 본래 국가고시란 합격한 사람보다 떨어지는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시험이기 때문이다. 급기야 생몰 연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던 이름 없는 유생을 일거에 대문호 반열에 올려놓았다. 청나라 강희제는 이 시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풍교로 친히 찾아왔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풍교라는 다리 이름이 유명 사찰보다 더 알려지면서 남송 시절에는 한때 한산사를 풍교사로 불렀던 적도 있었다. 좋은 시 한 편의 전방위적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 한산사(寒山寺) 입구에 있는 풍교는 강남 지방과 베이징을 잇는 운하(運河) 위에 걸려 있다. 이 다리 역시 장계가 다녀간 이후 무너지고 다시 만들기를 반복하며 오늘까지 이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로 몇 번씩 없어진 한산사 범종도 이 시 때문에 복원되어 옛 종소리의 맥을 이어갔다. 많은 서예가가 시대를 달리하며 이 시를 인근 여기저기 새겼고, 그 탁본은 인기 관광 상품이 되어 옛사람과 현대인을 이어주는 다리 노릇까지 하고 있다. 그 옛날 다리 아래 뱃전에서 하룻밤 묵었던 인연이 일천수백년 세월 동안 저자와 독자를 이어주는 모양 없는 영원한 다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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