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동에서 다시 짜파구리로… 번역도 역주행!

조선일보
입력 2020.02.13 03:00

[봉준호 신드롬] [1인치 장벽을 넘어 세계로] [3] 언어의 위계 바꾼 기생충의 힘

Only Child→외동딸, 옥스퍼드 대학→서울대…
해외 관객들, 英 자막 대신 한국어 발음대로 쓰고 읽어
'준호 봉' 대신 '봉준호' 이름도 한국식으로 姓 먼저

본래는 '람동(Ramdon)'이었다. 영화 '기생충'의 영문 자막을 번역한 달시 파켓은 영화 속 연교(조여정)가 충숙(장혜진)에게 "짜파구리 만들 줄 알아요? 다송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7분 만에 끓여주세요. 한우 채끝살 좀 구워서 올려주고요"라고 말하는 장면 앞에서 꽤 오래 고심해야만 했다. '짜파구리('짜파게티'와 '너구리' 라면을 섞은 것)'라는 단어는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고유명사였다. 영미권과 유럽 관객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고민하다 파켓이 생각해 낸 단어가 바로 '람동'이다. 라면(Ramen)과 우동(Udon)을 합성한 말이다.

'기생충'이 처음 해외에서 개봉했을 때만 해도 이 '람동'은 알아듣기 어려운 한국 특유의 신조어를 외국인에게 적절하게 전달해 낸 좋은 번역의 대표 사례로 꼽혀왔다. 그러나 북미 흥행에 속도가 붙고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상까지 따내면서 상황은 역전됐다. 적지 않은 외국인은 이제 짜파구리를 우리 발음 그대로 '짜파구리'라고 읽고 'Jjapaguri'라고 쓴다. 영화 속 '외동딸(only Child)'이란 단어도 '외동딸(Oedongddal)'이란 발음 그대로 읽으며 주제곡 '제시카 징글'을 부른다. 번역이란 필터를 통과해야만 도달됐던 우리의 언어와 문화가 '기생충'을 만나며 의외의 반전을 만난 것이다.

◇패러사이트? 기생충이 더 상징적!

외교전문지 '더 디플로맷'은 최근 '기생충, 외국어 그 너머로(Parasite: Moving Beyond 'Foreign')'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하면서 "영화 '기생충'이 왜 꼭 외국어·영어로 구분돼야 할까?"라고 썼다. 필자 레인 밴던버그는 "영화 제목인 'Parasite'는 본래 한국어로 '기생충(Gisaengchung)'이라고 읽는다. 한국 제목은 '기생하다'라는 뜻과 '벌레'라는 뜻을 동시에 품고 있다. 영미판 제목인 'Parasite'보다 더 많은 함의를 갖는다. '기생충'이란 제목이 영화에 더 걸맞은 이유"라고 썼다. 낯설고 발음하기 쉽진 않지만, 번역된 말보다 더 정확하게 영화 내용을 반영하는 제목이 바로 '기생충(Gisaengchung)'이라는 것이다.

지난 9일(현지 시각) 영국 런던 한 극장에 ‘기생충’을 보러 들어가는 관객들(큰 사진). 해외 관객들은 이제 영화에 등장하는 우리말을 그대로 읽고 쓰기 시작했다. ‘봉준호(Bong Joon ho)’라고 적은 티셔츠를 파는 곳도 생겼고(아래 왼쪽), ‘짜파구리’를 ‘Jjapaguri’라고 쓰는 일(아래 오른쪽)도 많아졌다.
지난 9일(현지 시각) 영국 런던 한 극장에 ‘기생충’을 보러 들어가는 관객들(큰 사진). 해외 관객들은 이제 영화에 등장하는 우리말을 그대로 읽고 쓰기 시작했다. ‘봉준호(Bong Joon ho)’라고 적은 티셔츠를 파는 곳도 생겼고(아래 왼쪽), ‘짜파구리’를 ‘Jjapaguri’라고 쓰는 일(아래 오른쪽)도 많아졌다. /런던동아시아영화제 페이스북·superyaki.com

영화 속 기택(송강호)이 "서울대 문서위조학과가 있으면 수석 합격감"이라고 말하는 장면도 영미판 자막에서 조금 다르게 번안됐었다. 서울대를 모를 수 있는 해외 관객을 위해 서울대가 옥스퍼드 대학으로 바뀌었던 것. 그러나 최근 해외 네티즌들은 이 장면조차 이젠 '서울대(Seouldae)'라는 원래 발음을 찾아서 부른다. 영어식 표현(Seoul National University)이 아닌 그냥 서울대다.

'제시카 징글'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라는 영화 속 노래도 본래 영어 번역은 'Jessica onlychild Illinois Chicago'지만, 요즘 트위터에선 한국 발음 그대로 부르는 것이 더 유행이다. 호주 시드니에 산다는 험버트씨는 자신의 트위터에 발음 그대로 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 영상을 찍어 올리면서 이렇게 썼다. "'과선배는 김진모', 이 부분이 젤 힘들었어!"

◇준호봉 아닌 봉준호

지난 9일(현지 시각)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발표했던 스파이크 리 감독은 "봉준호"라고 정확한 우리식 이름을 또박또박 외쳤다. 한국 이름을 외국에서 부를 때 이름 먼저 쓰고 성을 나중에 부르는 미국식 표기를 할리우드 주요 매체나 배우·감독들이 안 쓰게 된 것도 '기생충' 이후 변화다. '준호 봉'이나 '강호 송' 대신, 봉준호와 송강호로 부르게 된 것이다. 북미 배급사 네온(NEON)과 CJ ENM 영화사업본부 해외배급팀이 우리식 발음 그대로 홍보한 결과다. CJ ENM 측은 "자막부터 이렇게 표기했다. 봉 감독의 의지였다"고 했다. 영화의 힘이 1인치 언어 장벽을 넘다 못해 문화 흐름마저 역전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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