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실의 뉴스 읽기] 숙주 삼킨 기생충… '봉' 잡은 건 아카데미

조선일보
입력 2020.02.13 03:00

[할리우드는 왜 봉준호 택했나]

"문화제국주의" "백인만의 잔치" 92년을 난타당한 할리우드
최근 10년간 9명의 非미국인에게 감독상 쥐여주며 위기 탈출을 시도했다
그래도 회의론 멈추지 않자 다급한 아카데미, 봉준호 선택

박은주 논설위원
박은주 논설위원

"단체를 하나 만듭시다. 노동단체와 협상을 중재하고, 우리 업계 이미지도 높이게 말이죠." 1926년 MGM영화사 대표가 할리우드 제작자, 감독, 배우를 모아 '단체'를 만들었다. 이것이 아카데미 시상식 심사를 주관하는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로 발전했다. '아카데미 영화제'의 출발은 '학회(아카데미)'라는 이름과는 반대로 꽤 '정치적'이었다. 아카데미는 할리우드의 업적에 대한 보상이자, 영화계의 '가치'를 배열하는 '숨은 이데올로그' 역할을 해왔다.

한국 자본, 한국 감독이 만든 영화 '기생충'이 지난 9일(현지 시각)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극영화상을 받았다. '한국 영화의 우수성을 입증했다'는 말은 이 사건을 둘러싼 가장 낮은 단계의 해석이 될 것이다. 미국에서는 "봉준호 기록이 1953년 월트 디즈니와 같다"는 기사도 나왔다. '할리우드의 침탈'을 걱정하던 봉준호가 '미 문화 제국주의'의 상징이라 비난받던 월트 디즈니에 비견되는 일, 누가 연출이나 한 것처럼 절묘하다.

◇할리우드 영화 상영관에 뱀 푼 지 32년

1988년 9월, 할리우드 영화 '위험한 정사'가 상영되던 극장. 직원이 좌석 밑에서 뱀 여럿이 담긴 망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미국 영화 직배(直配) 반대 투쟁을 하던 정지영 감독이 구해온 것이었다. 야생 뱀이 극장 시멘트 바닥에서 널브러져 맥을 못 추는 바람에 사고는 없었다. 직배 반대 투쟁은 이후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으로 발전했다. 한국 영화인들에게 '할리우드'는 언제나 괴력의 상징이었다.

봉준호도 이 운동 선봉에 있었다. "각국 영화를 할리우드의 시장 독과점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할리우드가 창조력 위기라든가, 국제 영화시장에서 과거보다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은 2006년 3월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1인 시위를 마친 후 이렇게 말했다. 두 달 후 영화 '괴물'로 프랑스 칸 영화제에 초청받은 봉 감독은 거기서도 1인 시위를 했다. 광고 출연료도 운동에 기부했다.

지난 9일 밤(현지 시각)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작품상, 감독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이 시상식 후 ‘오스카’ 트로피를 들고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 9일 밤(현지 시각)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작품상, 감독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이 시상식 후 ‘오스카’ 트로피를 들고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다. /AFP 연합
그해 상영된 '괴물'은 관객 1300만명을 넘겼다. 전국 647개 스크린(43.8%)에서 상영돼 '상영관 독과점' 논란, '반미 영화 논란'이 일었다. 감독은 후자에 대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강에서 괴물이 나오는 영화를 구상한다면, 맥팔랜드 사건(2000년, 미군의 포름알데히드 한강 무단방류사건)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나… (영화 속) 화학약품 '에이전트 옐로'는 (미군)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에서 따왔고, 미군의 대사 '노 바이러스'는 이라크전 이후 살상무기가 사실은 없었다는 미국의 발표를 연상시킨다." 영화 '설국열차'는 '계급 사회'를, '옥자'는 공장식 사육을 비판하며 '동물 주권'을 다뤘다. 연세대 사회학과 88학번, 화염병을 들어 구속된 전력이 있으며, 민노당원이었던 감독에게 낯설지 않은 주제다. 우파 정권은 봉준호를 '블랙리스트'에 넣었다.

◇할리우드 "미국이 싫어? 어서 와" 전략

할리우드는 '외국 감독 입양' 전문이다. 2000년 멕시코 감독 알레한드로 이냐리투가 장편 데뷔작 '아모레스 페로스'로 칸 영화제에서 '비평가 주간 대상'을 탔다. 파탄 난 멕시코 현실이 그려진다. 감독은 "절대 멕시코를 떠나 미국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1993년 미국과 NAFTA를 체결한 멕시코는 1997년 자국영화보호정책을 완전 철폐했다. 미국 때문에 거덜 난 멕시코 영화계를 떠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해석됐다. 2년 후, 이냐리투 감독은 가족들과 함께 LA로 이주했다. 메이저 영화사와 영화를 계속 찍었고, 미국 '영웅물' 주인공의 파멸을 소재로 한 '버드맨', 서부시대를 다룬 '레버넌트'로 잇달아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다. 멕시코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장대한 우주 드라마 '그래비티', 멕시코의 민주화운동을 다룬 '로마'로 두 차례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다. 같은 나라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역시 인종차별이 심했던 1960년대 소수자 여성을 그린 '셰이프 오브 워터'로 감독상을 받았다. 세 감독은 5개의 감독상 트로피를 가져갔다. "할리우드를 '3아미고(친구)'가 지탱한다"는 말이 나왔다. 대만 출신 리안 감독도 2006년 '브로크백 마운틴', 2013년 '라이프 오브 파이'로 감독상을 받았다.

최근 10년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 명단 그래픽

할리우드의 '새 사랑'은 단연 봉준호였다. 그가 자본주의 모순, 반미, 공권력 조롱을 세련되게 영화에 녹여낼 때마다 제작자들은 흥분했다. '설국열차'는 2013년 미국 개봉 후 미 제작사가 판권을 사 TV 시리즈로 제작 중이다. '기생충'도 HBO에서 TV드라마 판권을 샀다. 넷플릭스는 2017년 영화 '옥자'에 5000만달러 전액을 투자했다. '옥자'가 그해 칸 영화제에 진출하자, 프랑스 극장주들이 시위를 벌였다. "넷플릭스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 결국 극장 몇 개에서 개봉하는 시늉을 해 극장주 체면을 살려줬다. '봉준호의 넷플릭스 영화'는 미국이 주도하는 플랫폼 대격변 시대, 기득권의 반발을 무마하는 칼로도 쓰였다.

◇'아카데미'가 더 급했다

"'기생충'에 아카데미가 필요하다기보다, 아카데미에 '기생충'이 더 필요하다." 시상식 전 'LA 타임스'는 이런 기사를 내보냈다. 아카데미를 향한 비난 수위가 여간 높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2016년 연기상 후보가 전부 백인으로 채워지자, '오스카는 백인잔치(#OscarsSoWhite)'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유색인 심사위원 비율을 2015년 8%에서 2019년 16%까지 늘렸지만 할리우드에 다양성이 부재한다는 비판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성적 유린'이 만연했던 미 영화계가 '미투' 운동의 최대 표적이 된 것도 큰 고심 거리였다. 그저 '시늉'으로는 '아카데미 회의론'을 넘어설 수 없었다. 이번 선택은 '입양아'를 찾는 것 이상이었다. 한국 자본, 한국 감독, 한국 배우, 한국어…. 평판 위기에 처한 할리우드와 아카데미가 입양아 대신 심지어 '숙주'를 찾은 건 아닌가? 영화 '괴물'의 외국어 제목은 '호스트(The Host·숙주)'였다.

"첫 주부터 밀어주자" 봉준호 美 뒷배 돼준 젊은 아시안 아메리칸
美 기생충 '골드 오픈' 캠페인

"티켓 여러 장 샀어요. '기생충' 보러 같이 가요." 지난해 10월 초, 영화 '기생충'의 미국 개봉을 앞두고 인스타그램에 '#Parasite(기생충)' '#goldopen(골드오픈)'이라는 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골드 오픈'은 영화, 책, 음반 등 아시아 문화 콘텐츠가 발매될 때 '첫 주 성적'을 밀어주자는 캠페인이다. '아시아 정체성'을 기치로 내건 비영리단체 '골드 하우스'는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3주간 1위를 차지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개봉 때도 이런 캠페인을 했었다. 미국에 사는 젊은 '아시안 아메리칸'들은 '기생충' 시사회 사진, 패러디 사진을 SNS에 공유했다. 이들이 자발적인 '변방의 마케터'였다.

'기생충 신화'의 구성 요소는 높은 영화 완성도, CJ의 홍보, 이미경 부회장의 할리우드 네트워크 등으로 추려진다. 황수진 전 영화진흥위원회 LA 사무소장은 '봉준호의 매력'을 거기에 더했다. "방탄소년단이 SNS를 통해 세계적인 '현상'이 됐듯, 봉준호 감독의 '팬덤'도 BTS를 연상시킨다." 큰 체구에 파마머리 같은 만화적 비주얼, 특유의 유머감각이 '전형적인 동양 남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새로운 문화 상징(밈)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패의 이유가 하나가 아니듯, 성공의 비결도 여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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