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의 어둡고 눅눅한 반지하… 세계가 "우리 문제였네" 빠져들다

조선일보
입력 2020.02.12 03:40

[1인치 장벽을 넘어 세계로] [2]

영국 매체 ' 가디언'이 소개한 영화 '기생충'의 반지하 풍경.
영국 가디언 등 외신들 반지하 집중 조명 - 영국 매체 ' 가디언'이 소개한 영화 '기생충'의 반지하 풍경. 외신들은 이 반지하를 한국의 빈부 격차와 계급 갈등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보고 주목한다.
"한국의 수도 서울엔 수천 명이 사는 반지하(Banjiha)라는 곳이 있다. 햇빛이 거의 들지 않고 비좁은 곳이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방 안을 훔쳐볼 수도 있고, 여름은 습기, 더위와 싸워야 한다. 이 공간을 소재로 만들어 놀랍게 히트한 영화가 바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난 다음 날인 10일(현지 시각) BBC뉴스가 보도한 내용이다.

지난 9일(현지 시각) '기생충'이 작품상·감독상·국제극영화상·각본상까지 네 부문에서 미국 아카데미상 트로피를 휩쓸자, 외신들은 앞다퉈 영화 속 반지하라는 공간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기생충'은 한국어로 만든 한국 영화이지만, 전 세계 42개국에서 개봉해 25개국에서 역대 한국 영화 1위 기록을 세울 정도로 글로벌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이런 '기생충'의 중심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공감각의 언어가 있었다. 겨우 스며드는 빛(시각)과 창문 밖에서 들리는 취객의 음성(청각), 습기(촉각)와 곰팡이 냄새(후각)까지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바로 반지하란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렷한 공감각으로 다양한 나라의 관객을 설득해낸 것. 봉준호 감독의 가장 큰 장기이기도 하다. 그는 지금껏 대다수 영화에서 긴 대사보단 강렬한 이미지로, 부연보단 직관으로 관객에게 말 걸어왔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에서 가장 한국적인 풍경으로 그려낸 반지하에 대해 제일 먼저 보도한 건 일본 아사히신문이다. "영화 '기생충'이 서울의 반지하 삶을 반영해 빈부 격차 문제를 다뤘다"고 썼다. "반지하에 사는 80대 노인도 있다. 가난 때문에 작은 집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최근엔 젊은이들도 어쩔 수 없이 반지하를 택한다"고도 썼다.

◇'반지하'의 공감각, 세계를 설득하다

와이어드 매거진 미국판 역시 "'기생충'은 날카로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건축적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써서 성공한 영화"라고 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반지하에서 피자 상자를 접는 모습만으로도 관객은 이미지에 빠지고 이야기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아예 반지하란 공간이 어떻게 한국에 뿌리내렸는지 조명했다. "1970년대 한국 정부가 북한 침략에 대응하고자 건물을 지으면서 지하실을 만들게 했는데, 이후 주택난이 심해지면서 이곳이 거주지로 바뀌었다"는 것. 버라이어티 역시 "관객은 영화에서 '불쾌한 냄새'라는 말을 듣는 순간 영화 속 가난한 이들의 삶을 자기 삶과 동일시한다"고 했다. 공간의 이미지, 공감각이 불러일으키는 즉흥적 감흥이 전 세계 관객을 단숨에 납득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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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 촬영 당시, 봉준호와 배우들… BBC, 한국반지하보도 - '기생충'에서 반지하 집에 사는 기택(송강호) 가족의 식사 장면을 촬영하는 모습(왼쪽 사진). 음습한 반지하는 한국적 풍경인 동시에 빈부 격차라는 주제를 전달하는 보편적 배경이 된다. '기생충'의 배경이 된 서울 반지하 방의 실제 삶을 조명한 영국 BBC 보도 화면(오른쪽 사진). /연합뉴스·BBC 웹사이트
이미지로 이야기를 쌓아가는 봉준호식 화법을 쓴 작품은 '기생충' 이전에도 있었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출구를 찾기 어려운 복도식 아파트와 옥상, 아파트의 지하 공간처럼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을 겹쳐놓아, '기생충'의 예고편이란 평을 듣는다. '살인의 추억'의 경찰서 취조실, 영화 '마더'의 골목길 같은 공간도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곳. 당시 한국을 지배했던 비정상적인 시대의 공기를 강렬한 '한 컷'으로 전달한다. 각본을 쓰면서 스토리보드를 빼곡하게 그리는 만화광 봉준호라 가능한 일이었다. 머릿속 이미지를 스토리보드로 옮기고, 그림 그대로 작품을 찍는다. 찍기 직전 이미 완성된 그림이 있는 것이다.

◇직관적으로, 쉽게 더 쉽게

'기생충' 해외 배급팀이 전 세계에 퍼트린 직관적 포스터와 살갗에 와 닿는 쉬운 문구는 영화 '기생충'을 흥행시킨 또 다른 요소다. 높다란 계단과 어두운 지하 공간 등을 선명하게 드러낸 포스터일수록 각광받는다. 중국 아티스트가 그렸다는 '기생충' 포스터는 영화 속 기택(송강호)이 애지중지하는 산수경석을 위아래로 겹쳐 놓은 것. 물 위 공간과 물 아래 공간을 대비해 양극단의 가족 이야기를 그렸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앤드루 배니스터가 그린 영국 포스터 아트는 박 사장(이선균)네 네 가족과 기택 식구를 계단 위아래로 포개놓았다.

나라마다 색다른 부제로 더 쉽게 다가가는 것도 특이점이다. 지난달 10일 개봉해 연일 매진을 기록하고 있는 일본판 '기생충'의 부제는 '반지하 가족'. 스위스·독일에서 개봉할 때는 '침입자를 찾아라', 호주·뉴질랜드판에선 '잘못된 가족'이란 부제를 함께 썼다. 홍콩·마카오 개봉판에선 '상류 기생족'이, 헝가리판에선 '공격받은 장소'란 문구가 붙었다.

◇개인적이어서 더 창의적인

한국 영화 '기생충'이 주는 보편적인 감동은 봉 감독의 개인적인 에피소드에서 시작됐다. 가령 영화 '마더'에서 김혜자가 관광버스를 타고 가면서 기괴한 춤을 추는 장면은 봉 감독이 농활 가서 아주머니들과 막걸리 마시고 춤추던 기억을 녹인 것. '플란다스의 개'의 배경인 복도식 아파트는 봉 감독이 신혼시절 살던 곳이다. 봉 감독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이름을 언급하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고 말한 것을 그는 직접 자신의 작품을 통해 실현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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