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대통령의 밥솥' 농담

입력 2020.02.08 03:16

밥솥에 비유하자면 文 정부는 가장 큰 밥솥으로 시작했지만
훗날 전해질 '밥솥 농담'은 '밥 배 터지게 먹고 밥통 박살 냈다'

최규민 경제부 차장
최규민 경제부 차장
'이승만은 미국서 돈을 빌려 가마솥을 장만했지만 밥 지을 쌀이 없었다. 박정희는 농사를 지어 밥을 했지만 정작 본인은 맛도 못 봤다. 최규하는 솥뚜껑 열다가 손만 데었고, 전두환은 그 밥을 일가친척끼리 다 먹었다. 노태우는 남은 누룽지를 긁어 혼자 다 먹었고, 김영삼은 밥솥 바닥을 긁다가 구멍을 냈다. 김대중은 국민이 모아준 금과 신용카드 빚으로 미국에서 전기밥솥을 하나 사왔다. 노무현은 110V를 220V에 잘못 꽂아 밥솥을 태우고 코드가 안 맞는다고 불평했다.'

노무현 정부 때 유행했던 '대통령과 밥솥' 농담이다. 김대중 대통령 퇴임 후 측근들이 동교동 자택을 찾아 이 우스갯소리를 들려주자 대북 송금 특검 등으로 침울해 있던 김 대통령이 껄껄 웃었다고 한다. 이후 보수 정권을 거치면서 조금 더 살이 붙었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몇 가지 버전 중 '이명박은 밥솥 기술자인 줄 알았는데 어디 꽂는지도 모른 채 삽질만 했고, 박근혜는 최순실이라는 식모한테 밥통을 내줬다'가 가장 그럴듯하다.

밥솥에 비유하자면, 문재인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튼튼하고 커다란 밥솥으로 시작한 정부다. 우선 대내외 경제 여건이 꽤 좋았다. IMF 외환 위기 속에서 출발한 김대중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각각 카드 사태, 글로벌 금융 위기, 남유럽 재정 위기라는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시점은 세계경제가 지난 10년간의 긴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와 본격적으로 반등하던 시기였다. 전 정부가 담뱃세 인상, 세제 개편 등 욕먹는 정책을 추진하고, 반도체를 비롯해 기업 이익이 크게 늘어난 덕에 나라 곳간도 어느 때보다 풍족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첫해인 2013년 202조원이던 국세 수입은 2018년 300조원에 육박했다. 요컨대 국민이 최순실에게서 빼앗아 건네준 밥솥을 문 대통령이 열었더니 흰쌀밥이 그득했던 셈이다.

문 대통령에게는 전임자들이 갖지 못한 든든한 자산이 하나 더 있었다.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다. 그는 문민정부 이후 80% 넘는 지지율로 출발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지금 당장 힘들더라도 다음 세대를 위한 밥을 지어야 한다"고 국민을 설득해 '어렵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을 할 기회가 문 대통령에게는 충분히 있었다. 기득권 세력을 설득해 새로운 산업이 성장할 기반을 마련하고, 노동시장을 개혁해 기업이 부담 없이 직원을 채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미래 세대에 부담이 될 각종 연금을 개혁하는 일 같은 것이다. 모두가 알듯 이런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가 밥을 지은 양 여기저기 퍼주며 생색을 냈을 뿐이다.

집권 반환점을 돌아서자 화수분인 줄 알았던 밥솥은 바닥을 드러내는 중이다. 반도체 호황이 끝나며 작년 세금은 목표했던 것보다 1조3000억원 덜 걷혔다. 기업 실적 감소가 본격 반영되고 부동산 거래가 얼어붙은 올해는 세수 사정이 더 심각할 것이다. 그래도 한번 커진 씀씀이는 줄일 수 없어 이미 60조원 빚을 내기로 돼 있는데, 아마 총선 때쯤엔 '우한 폐렴으로 침체된 국내 경기 진작을 위해 추경이 불가피하다'며 마이너스 카드를 더 긁겠다고 나설 게 뻔하다. 공고하던 지지율은 40%대로 떨어져 이제는 뭘 해보려 해도 지지보다 반대가 더 많아졌다.

문 대통령은 "퇴임 후 조용히 잊혀지고 싶다"고 했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문 대통령도 훗날 '대통령과 밥솥' 농담에 한 줄 추가될 것이다. 아마 "밥을 배 터지게 퍼먹고 밥통을 박살 낸 다음 '이제 모두 공평해졌다'고 주장했다" 정도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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