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사우디 왕세자는 왜 아마존 CEO를 해킹했나

입력 2020.01.23 13:26

살해된 카슈끄지, 베이조스 소유 WP에 정기적으로 기고
베이조스 스마트폰 해킹 5개월 후 카슈끄지 ‘토막살해’
존슨 英 총리 등 거물과 개인 연락처 공유...추가 해킹 우려도

‘중동 왕세자 대(對) 세계 최대 부호.’

이슬람권의 ‘큰 형님’이 미국 거부(巨富)와 앙숙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세계 최고 갑부인 제프 베이조스(56) 아마존 창립자가 사용하는 ‘아이폰X’를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해킹했다는 주장이 강한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면서, 이제 ‘왜 사우디가 베이조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려 했을까?’라는 질문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영국 가디언을 포함한 전 세계 언론은 21일(현지 시각) 베이조스가 지난 2018년 5월 빈 살만 왕세자로부터 모바일 채팅앱 ‘왓츠앱’ 메시지를 받은 직후, 사생활이 담긴 문자 내역을 포함한 방대한 정보가 유출됐다는 주장을 내놨다고 전했다.

빈 살만 왕세자가 보낸 메시지는 사우디 통신 시장을 홍보하는 지극히 평범한 아랍어 동영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조스 측 주장이 사실이라면 사우디 왕실이 친분을 미끼삼아 세계 1위 부호 휴대전화 해킹을 주도한 셈.

 2018년 3월 30일 미국 시애틀에서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주(왼쪽)와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편한 차림으로 만나 대화하고 있다. /사우디 프레스 에이전시 홈페이지
2018년 3월 30일 미국 시애틀에서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주(왼쪽)와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편한 차림으로 만나 대화하고 있다. /사우디 프레스 에이전시 홈페이지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결 구도가 현실에서 펼쳐진 뒷배경에는 베이조스가 소유한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가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10월 사우디 왕실에 의해 암살당한 것으로 알려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에게 칼럼 쓸 자리를 마련해 줬다.

‘빈 살만 왕세자는 무너진 사우디의 위엄을 되살릴 생각부터 해야 한다.’
‘사우디는 캐나다에 꼭 해야할 말도 못할 만큼 배짱이 없다.’
‘사우디에서 이제야 여성 운전이 허용됐다. 왕세자가 가야할 길이 이렇게나 멀다.’
‘빈 살만 왕세자가 블랙팬서(아프리카 출신의 ‘어벤져스’ 멤버가 등장하는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보고 배워야만 할 것들.’

모두 카슈끄지가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칼럼 제목들이다. 그는 2017년 9월 언론 탄압을 피해 사우디를 빠져나온 후 살해되기 직전까지 1년 내내 빈 살만 왕세자를 비판하는 기고문을 써올렸다.

빈 살만 왕세자는 극히 보수적인 이슬람 왕국 사우디에서 사회적 규제 완화, 여성 권리 확대, 경제 구조 다변화 같은 개혁 정책을 내세워 젊은 층을 지지기반으로 삼으려던 인물이다. 사우디 실세로 자리를 굳히며 이런 노력이 빛을 보려는 가운데, 매주 자신에게 부정적인 칼럼을 실어주는 미국 유력 매체야 말로 그야말로 ‘눈엣가시’였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베이조스가 스마트폰을 해킹당하고 5개월이 지난 2018년 10월, 카슈끄지는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사우디 대사관 안에서 처참하게 ‘토막 살해’당했다. 카슈끄지 사건을 조사한 유엔 관계자들은 ‘사우디 왕실이 베이조스 아이폰에서 카슈끄지 위치와 연락처 같은 정보를 빼냈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달 사우디 법원은 카슈끄지 살인에 연루돼 기소된 11명 중 5명에게 사형, 3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했지만, 빈 살만 왕세자 측근엔 모조리 무죄를 내렸다. 빈 살만과 이번 사건에 대한 관련성을 사법부 차원에서도 완강히 부인한 것.

그러나 베이조스가 고용한 사설 조사관 앤소니 페란테에 따르면 카슈끄지 살인을 주도한 사우드 알 카타니란 인물은 살인 계획 단계에서 동영상을 보내 메시징앱을 해킹하는 기술을 보유한 보안기업 지분 20%를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0월 2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1주기 추도식에서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주(왼쪽)가 카슈끄지의 약혼녀 하티제 젠기즈와 함께 추모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10월 2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1주기 추도식에서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주(왼쪽)가 카슈끄지의 약혼녀 하티제 젠기즈와 함께 추모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카슈끄지 건과 별개로 워싱턴포스트 논조를 순화하기 위해 베이조스 개인에 대한 길들이기 차원이었다는 시각으로 이번 해킹을 보는 시각도 있다. 지난해 1월 미국 타블로이드 매체 ‘내셔널 인콰이어러’가 폭로한 베이조스의 혼외 관계 관련 기사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는 해석이다.

당시 내셔널 인콰이어러는 전 방송기자이자 앵커 출신인 로렌 산체스와 베이조스가 혼외 관계라고 폭로하면서 베이조스가 산체스와 주고 받은 문자내역을 포함한 사생활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후 내셔널 인콰이어러는 취재원을 추궁하는 물음에 "로렌의 오빠로부터 제보받았다"고 답변했지만, 베이조스는 해킹 같은 개인정보 유출 없이 이런 기사는 나올 수 없다고 보고 자체 조사를 시작한 결과, 지금에 이르렀다.

유엔 특별조사관 데이비드 케이는 "워싱턴포스트가 사우디에 관한 부정적인 보도를 멈추지 않으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잠재적 목적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해킹 배경을 추정했다.

베이조스가 아닌 추가 피해자가 앞으로 더 나타날 가능성 역시 상당히 크다. 빈 살만 왕세자는 그동안 ‘오일머니’ 다발로 중동을 넘어 세계를 주무르려는 의도를 끊임없이 드러내 왔다. 이 과정에서 그는 베이조스를 포함한 수많은 지도자들과 업무용 전화번호가 아닌 사적인 전화번호를 나눠 눈길을 끌었다. 품위와 격식을 중시하는 외교가(街)에서 이런 행동은 일종의 파격으로 치부되며 ‘젊고 탈권위적인 왕세자’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한 몫을 했다.

그러나 베이조스 해킹 사건 유력 용의자로 빈 살만 왕세자가 거론되면서, 그와 전화 번호를 교환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를 포함한 다른 지도자들 역시 해킹에서 자유롭지 않은 점이 드러났다고 영국 인디펜던트는 전했다.

가디언은 "사우디 경제구조 쇄신을 위해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를 상장하고, 서방 투자를 유치하려던 왕세자의 노력이 이번 사건으로 순식간에 훼손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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