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뽑으러 간다고? 요즘 방앗간에선 누룽지커피 마시고 쿠킹클래스 엽니다

입력 2020.01.18 03:00

[아무튼, 주말]
새로운 놀이터 방앗간·정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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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의 ‘색장정미소’는 옛 모습을 살려 ‘재건’ 후 전시장 겸 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박근희 기자
"나 어릴 때는 말이야~. 설 대목 앞두고 방앗간 갈 때 동네 아주머니들이 새벽같이 일어나 쌀 포대를 들고 가 눈치 게임을 해야 할 정도였단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강원도 강릉의 한 방앗간 개조 카페. 60대 남성이 목소리 높여 옛날 방앗간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설만 다가오면 꼭두새벽부터 달려가서 줄서기 해야 했던 곳, 방앗간이다.

최신 설비를 갖추고 여전히 성업하는 곳도 있지만 떡 뽑으러, 기름 짜러, 고추 빻으러, 쌀 찧으러 갔던 전통 방앗간과 정미소는 많이 사라졌다. 대신 카페부터 전시·공연·쿠킹클래스 체험까지 즐기는 새로운 놀이터가 된 이색 방앗간과 정미소를 찾아가 봤다.

시설 가동 어려워 카페로

강원도 강릉 임당동의 카페 100년임당방앗간에 들어서니 거대한 목조 정맥기와 제분기가 반긴다. 우렁찬 소리를 내며 곡식 껍질을 벗겨 내고 고운 가루를 털어냈을 기구들은 멈춘 지 오래. 무동력 전시품이 돼 카페 중앙에서 손님을 맞는다. 시멘트 벽면에는 '354㎏' '건봉사' '성창' 등 방앗간으로 운영하던 시절 거래처 전화번호, 곡식 무게를 계산한 낙서가 남아 있다. 카페 안쪽 '콩두방'엔 옛날식 고추 빻는 기구가 원형 그대로 전시돼 있다. 마치 방앗간 박물관에 들어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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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방앗간 시설과 기구들을 그대로 전시한 강원도 강릉의 카페 ‘100년임당방앗간’.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1960년대 운영을 시작해 지난해 2월 말까지 동네 방앗간으로 주민들 사랑을 받아왔던 '임당방앗간'은 지난해 7월 카페로 바뀌었다. 1대 일본인 주인이 운영했다는 기간까지 합해 100년이란 시간을 이어온 공간이다. 시설이 낡고 주인도 연로해지면서 용도 변경이 불가피해졌다. 허물고 새로 건물을 짓는 대신 골동품 애호가 이춘우(70)씨와 딸 이상랑(34)씨가 빌려 사람들이 편히 찾아와 쉴 수 있는 카페로 꾸몄다. 카페 곳곳에 전시한 다이얼 전화기, 필름 카메라 등 골동품은 모두 이춘우씨가 오랜 시간 수집한 것이다. "소장한 골동품을 전시할 공간을 찾느라 방방곡곡 방앗간과 정미소, 양곡 창고 등을 둘러봤다"는 이씨는 "공간 대부분이 정체성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했는데 임당방앗간만큼은 원형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했다. 귀리를 넣은 방앗간라테는 고소하면서도 부드럽다. 각종 커피 외에 방앗간 미숫가루, 밀크티도 판다. 매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10시까지 운영.

차로 10분 거리에 '강릉 방앗간 카페'의 원조 격인 봉봉방앗간이 있다. 1층 카페 겸 아트숍에선 소소한 기념품을 구경하고 2층 갤러리에선 전시를 감상할 수 있다. 10년을 꽉 채운 공간인 만큼 강릉의 문화 사랑방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달 18일 용인 백암면 석실 마을 수정산 자락에 문 연 석실방앗간은 60여 년 동안 운영하다 1989년 문 닫은 동명(同名)의 방앗간을 30년 만에 카페로 되살려낸 공간이다. 서울 도심 카페에 비할 만큼 세련된 인테리어는 아니지만, 방앗간 뼈대를 그대로 유지해 예스럽게 꾸몄다. 주인 황경자(57)씨는 "시집 와서 1~2년간 남편과 함께 방앗간을 운영하다가 문 닫고 나서 30년간 그대로 뒀다. 철거하기엔 아쉬워 고민하던 중 용인시 '로컬푸드 농가형 곁두리 시범사업' 대상에 선정됐다"고 했다. 30년 전 '방앗간 집 새댁' 소리를 들었던 황씨는 이젠 50대 카페 주인이 됐다. 직접 농사지은 쌀로 만든 가래떡도 구워 팔고, 약식도 만들어낸다. 수제 과일청 에이드에 들어가는 과일청도 직접 담근다. 카페 내 화목 난로엔 호박과 고구마를 구워 오픈 이벤트(추후 판매 예정)로 나눠주고 있다. 동절기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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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강릉 방앗간 개조 공간’의 원조 격인 ‘봉봉방앗간’. ②강원도 강릉 일대 문화·예술인,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자리 잡은 ‘봉봉방앗간’. ③2014년 문 닫은 강릉의 옛 초당정미소를 카페로 꾸민 ‘초당커피정미소’. ④강원도 강릉 ‘초당커피정미소’의 ‘백커피’와 ‘누룽지라테’.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커피 마시고 전시·공연 보는 정미소

'방앗간' '정미소' '도정 공장'…. 부르는 이름은 제각각이지만, 곡식을 다루는 방식이 비슷한 시설이다. 1960년대 정부에서 식량 증산 정책을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성업한 곳이 농촌의 작은 방앗간과 정미소였다.

이후 1970~ 90년대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이농으로 농촌 인구가 크게 줄면서 자연스레 퇴락했다.

강릉 초당두부마을의 옛 정미소를 활용한 카페 초당커피정미소에도 그런 역사가 담겨 있다. 전신인 '초당정미소'는 1963년 문을 열었다. 카페 중앙에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면 대들보에 한자로 '1963년 상량(上樑·기둥을 얹고 마지막으로 마룻대를 올리는 일)'이라고 적은 게 보인다. 초당정미소는 찾는 이가 줄어들면서 2014년 문을 닫았다. 이후 새 단장을 마치고 돌아온 '초당 커피정미소'에선 인절미 크림에 두부 당고를 넣은 백커피, 12가지 곡물을 넣은 흑커피, 누룽지가 씹히는 누룽지 커피를 내세운다. 카페 내부엔 녹슨 정미소 시설과 낡은 목간판이 전시돼 있다. 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운영.

전북 전주 색장동 색장정미소는 70여 년간 정미소로 운영했던 공간을 예술·골동품으로 꾸민 이색 전시장이다. 15년 전쯤 폐업 후 방치됐다가 2년 전 전시 공간으로 기사회생했다. 정미소 건물은 원형을 살려낸 '작품'. 문화재 재건 전문가까지 동원해 건물을 해체한 뒤 건축 자재 중 쓸 수 있는 것을 최대한 골라 사진을 보며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재건했다. 깨진 창문 하나도 폐교에 있던 창문을 구해 달 정도로 옛 모습을 되살리는 데 집중했단다. 이의만(68) 대표는 이 과정을 사진으로 꼼꼼하게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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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기름을 주제로 한 복합문화공간이자 ‘도심형 방앗간’인 서울 중구 ‘쿠엔즈버킷’(왼쪽). 기름 관련 복합문화공간인 서울 중구 ‘쿠엔즈버킷’의 박정용 대표(오른쪽). /양수열 영상미디어기자
전시장 내부는 흑백사진, 구한말 미국 선교사가 가져온 피아노, 전국 각지에서 구한 골동품과 예술품으로 채웠다. 1층부터 다락방 같은 3층까지 장식한 소품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 대표는 "미술을 전공한 아내의 작업실을 꾸미려고 기획했다가 더 많은 이들과 옛것의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 전시장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전시장으로 쓰는 색장정미소 옆 한옥 건물은 아내의 작업실이자 아내가 운영하는 '애기똥풀 미술 학교'다. 색장정미소는 1인 문화 관람료 4000원을 내면 '오늘의 음료'를 무료로 준다. 배와 생강, 대추를 넣은 이강조차에 가래떡구이 한 접시를 맛보며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중장년층, 이색 카페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젊은 커플도 눈에 띈다. 전주한옥마을, 오목대가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매일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100년 역사를 지닌 전남 나주의 옛 나주정미소는 2010년부터 흉물로 방치됐다가 최근 다시 나주의 명소로 들썩거리는 중. 나주읍성권 도시 재생 사업을 통해 전체 5동 중 한 동이 복합 문화 공간 나주정미소(나주情味笑)로 탈바꿈하면서부터다. 4월까지 문화 콘서트 공연장인 '난장 곡간'으로 활용한다. 옛 나주정미소는 호남의 곡창 나주에서 생산된 쌀을 정미하는 대표 정미소이자 산업 시설, 정부 양곡 창고였다. 나주 학생 만세 시위 등 항일 운동 주동자들이 모여 회의를 하던 곳으로 건축적, 역사적 가치가 높다. 손보람(31) 나주시청 도시재생과 주무관은 "옛 나주정미소의 나머지 네 동도 복합 문화 공간이나 정미소 의미를 살린 박물관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있어 활용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했다.

진화한 도심 방앗간과 정미소

도심에선 진화한 방앗간과 정미소가 새로 생겨나고 있다. 서울 광희동 대로변 골목 안쪽 주택가에 들어선 쿠엔즈버킷은 참기름을 짜는 도심형 방앗간이다. 전시 겸 판매장인 '플래그 숍'이자 한국의 전통 기름을 주제로 쿠킹클래스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복합 문화 공간이기도 하다.

건물 모양부터 범상치 않다. 밑동이 살짝 좁은 커다란 '됫박'을 5개 겹쳐 놓은 듯하다. 석탑 같기도 하다. 건축가 문훈(문훈발전소 대표)이 설계했다. 지난해 4월 개업 후 줄곧 화제가 되고 있다. 개업 후 한 달 만에 일본의 한국 여행 정보 사이트인 '코네스트'에서 주간·월간 인기 순위 1위에 올랐다. 특히 일본인 방문객이 부쩍 늘었고, 현재 절반 정도가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 방문객이다. 박정용(51) 쿠엔즈버킷 대표는 "기획하고 완공하기까지 꼬박 2년이 걸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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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 역할을 대신하는 경기 수원의 쌀 편집숍 ‘동네정미소 수원광교’(위). ‘동네정미소 수원광교’의 ‘고추장불고기’와 ‘LA갈비구이’.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내부도 야무지게 활용했다. 협소한 공간에 지하 1·2층은 재료 창고와 카페, 1층은 플래그 숍, 2·3층은 공장, 메뉴 개발이 주 목적인 4층은 쿠킹 체험장으로도 운영한다. 사방이 뻥 뚫린 아담한 옥상은 행사가 있을 때 개방한다.

방앗간 특유의 강한 기름 향은 나지 않는다. 최신 설비를 갖춰 낮은 온도에서 기름을 짜 내는 '저온 압착 방식'으로 가공하기 때문이란다. 기름 짜는 시간에 맞춰 방문하면 통유리창 너머로 기름 뽑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시장 겸 판매장에선 제품을 시식하고 체험해볼 수 있다. 이곳 기름은 맑고 깔끔한 맛을 내면서도 고소한 맛이 강하다. 권숙수, 밍글스 등의 미쉐린 셰프들과 신라호텔 레스토랑 등 유명 식당에서 믿고 쓰는 '기름집'이다. 식용 기름 외에 기름과 참깻묵(참기름을 추출할 때 나오는 부유 물질) 등을 활용한 피부 관리용 오일도 발라볼 수 있다.

바에선 커피를 내리고 쿠키, 케이크, 잼처럼 발라 먹는 스프레드 등 자체 개발한 디저트와 소스도 판다. 4층에선 비건 브런치도 만들어 맛볼 수 있다. 두부 패티, 버섯, 양상추 등을 넣은 샌드위치와 샐러드, 커피에 깻묵을 활용한 참깨 드레싱·스프레드를 곁들인 브런치다. 쿠키 만들기 체험도 가능하다. 쿠킹 및 베이킹 클래스는 예약 인원이 차면 진행한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운영.

정미소의 현대식 버전인 '쌀 편집숍'에선 집밥이 인기다. 수원시 광교 '엘리웨이'에 있는 동네정미소 수원 광교 얘기다. 마포 본점이 새로운 기획을 위해 '식사 판매'를 중단한 상태. 대신 지난해 6월 문 연 수원 광교점에서 식사가 가능하다. 매일 아침 매장에서 바로 찧은 '오늘의 쌀'로 매장 안쪽 식당에서 집밥 같은 한식을 선보인다. 메뉴판에 오늘의 쌀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곁들여두었다. 두부조림(1만원)부터 고등어구이, 고추장불고기, LA갈비구이까지 든든한 한 끼를 맛볼 수 있다. 유기농 쌀을 써도 공깃밥은 1000원. 매장에선 전국 각지에서 발굴한 쌀과 함께 기능성 쌀, 곡물 가루, 기름, 가공식품 등을 전시·판매한다. 서종민(37) 소장은 "설을 앞두고 떡국 떡을 찾는 손님이 많아 곧 준비할 예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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