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모이 100년, 내가 사랑한 우리말] [17] 손 맛

조선일보
  • 배우 안성기
입력 2020.01.16 03:00

배우 안성기

내가 사랑한 우리말

요즘 같은 겨울철에 눈이라도 소복이 내리는 날이면, 어릴 때 살던 돈암동의 아담한 한옥과 마당 한쪽에 있던 장독대가 떠오릅니다. 흰 털모자를 뒤집어쓴 듯한 항아리와 독들이 경건하게 기도 드리는 사람처럼 고요히 서 있습니다. 앞쪽에 작은 키의 아이부터 뒤쪽으로 키 큰 아이들이 서 있던 초등학교 조회시간 모양으로 조그마한 항아리가 앞줄에, 중간 크기의 것은 가운데에, 큰 독들은 맨 뒷줄에 잘 정렬된 모습입니다.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손주들까지 오손도손 가족사진을 찍듯이 말이지요.

그런데 정겹던 한옥을 떠나 몇 번의 이사를 할 때마다 항아리와 독의 수가 점차 줄어들었고, 마지막 단독주택이었던 수유리 집을 떠나 강남 아파트에 신접을 차렸을 땐 더는 집에 옹기가 없게 됐습니다. 지니 요정이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여러 개의 항아리와 독이 몽땅 냉장고로 쏙 들어간 모양이 된 셈이지요.

아! 하나가 남아 있긴 합니다. 지금까지도 부엌 한쪽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쌀 항아리. 언제부터인가 장독대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사다 먹게 되었고, 집집이 고유한 장맛은 식품사의 제조 맛으로 바뀌게 되었죠. 모든 것이 단순, 편리해졌지만 뭔가를 잃어버리고 사는 느낌입니다. 흔히 말하는 어머니의 손맛, 정성 같은 것 말이지요.

배우 안성기

손맛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손으로 사랑을 담은 것이고 그것이 곧 손맛일 겁니다. 장독 뚜껑을 열고 손가락으로 살짝 장맛을 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오늘같이 추운 날엔 어머니가 마당에 묻어놓은 김장독에서 김치를 꺼내와 상을 차려 주시던 생각이 납니다. 반찬도 별로 없던 시절, 맛있게 익은 김장김치는 최고의 반찬이었죠. 강릉 분이신 어머니는 김장 배춧속에 꼭 명태를 회처럼 썰어 넣으셨습니다. 한겨울에 모든 맛이 밴 명태를 빼 먹을 때 그 맛이란! 그 손맛이 정말 그립습니다.

마당에 김장독을 묻던 장면도 떠오릅니다. 가족들이 함께 삽으로 흙을 파내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고, 그 옆 수돗가에서는 어머니가 김장하고 있는 모습들. 절인 배추에 김칫소를 싸서 맛보라고 어머니는 입속에 넣어 주고, 우리는 입을 한껏 벌려 받아먹는 모습. 마치 드론으로 촬영하듯, 마당의 화기애애한 모습부터 집 전체, 그리고 동네 전경까지 옛 모습이 한 폭 풍경화처럼 떠오릅니다. 저 아래 김장독 속엔 곧 어머니 손맛이 담겨 사랑으로 가득 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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