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 온 편지… 나는 이렇게 보이스피싱범이 됐다

조선일보
입력 2020.01.15 03:00

[인출책 역할해 수감된 40代 "일당 50만원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
온라인서 보이는 '고액 알바' 광고… 대부분 보이스피싱 인출책 역할
한 피해자에게 받은 수천만원, 암 진단금이란 사실 알고 큰 충격

감옥에서 온 편지… 나는 이렇게 보이스피싱범이 됐다
"이곳 교도소에는 저처럼 멍청한 짓을 해서 들어온 보이스피싱 조직 인출·수금책이 많습니다. 한결같이 페이스북 광고를 통해 엮인 사람들입니다. 그 범죄 유형을 말씀드릴 테니 많은 사람에게 알리시어 더 이상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수감번호 2○○○, 김철수·가명)

지난해 10월 말 지방의 한 교도소 수감자로부터 본지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자신을 보이스피싱 인출책이라고 소개한 김씨는 "보이스피싱 조직이 인출·수금책을 구하지 못하면 적어도 절반 이상의 피해자가 줄어들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평범한 직장인이 어떻게 보이스피싱 범죄에 빠져드는지 자신의 사례를 통해 소개했다. 기자는 최근까지 김씨와 8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 과정을 취재했다.

40대 후반인 김씨는 4건의 보이스피싱 범죄로 지난해 7월 구속 기소돼 재판받고 있다. 그는 대기업 하도급업체 직원으로 일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고액 알바(아르바이트)' 광고를 본 것이 그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단초였다.

"마침 급전이 필요할 때였는데 지방에서 물건을 받아서 서울까지 가져오는 '퀵배달'로 하루 일당 50만~100만원을 준다는 광고를 페이스북에서 보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김씨는 "교도소에 복역 중인 다른 보이스피싱범들도 대부분 페이스북이나 구인 광고지를 통해 범죄에 가담했다"고 했다. 길거리에 깔린 광고지 속엔 '○○금융 수금사원 모집'이라는 광고들이 있는데, 적지 않은 것이 보이스피싱 인출·수금책 모집 광고라고 했다.

김씨가 광고에 나온 번호로 전화했더니, 단순 퀵배달이 아니라 돈을 받아오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찜찜해 거절했으나 상대가 제시하는 높은 '수수료' 유혹에 넘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이스피싱 인출책 일이라는 게 확실치 않았다. 이후 김씨와 보이스피싱 조직 간의 대화는 모두 텔레그램·위챗 등 추적이 불가능한 메신저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해당 업체로부터 '차를 가지고 대구로 가서 물건을 받아오라'는 일거리를 받았다. 정작 대구에 도착했더니 '일'이 바뀌었다. 자신을 '김○○'이라고 칭하고 한 은행 앞으로 가서 검은색 옷을 입은 여성에게 돈을 받으라는 지시였다. 그 은행으로 가니 한 여성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700만원을 건넸다고 한다. 그 돈을 100만원씩 쪼개 업체가 알려준 여러 개의 계좌로 무통장 입금했다. 이 일로 김씨는 80만원을 챙겼다. 보이스피싱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두 번째는 대구의 한 지하철역 출구에서 한 여성으로부터 4000여만원을 받는 일이었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김씨에게 "(돈을 건네주는 사람은) 불법 수익과 세금을 탈루한 돈을 되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김씨는 이미 보이스피싱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숨기려 했다. 김씨는 경찰에 체포된 뒤 그 4000만원이 피해자가 평생 모은 돈이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세 번째는 같은 날 충북 충주에서 한 남성으로부터 수천만원을 받는 일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남성이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고 보험사로부터 받은 보험금이었다.

김씨가 접촉한 피해자들은 보이스피싱 조직이 보낸 '낚시 문자 메시지'에 당한 사람들이었다. 피해자들은 '디△△몰'이라는 업체 명의로 "결제 금액을 승인하라"는 내용 등이 담긴 문자를 받았다. 피해자들이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문자 메시지 속 인터넷 주소를 누르면 악성 앱이 피해자 휴대전화에 자동으로 깔렸다. 그 뒤론 휴대전화에 담긴 개인 정보가 보이스피싱 조직에 고스란히 넘어가고, 그 정보를 토대로 감쪽같은 사기가 시작됐다. 피해자와 관련된 신상 정보를 줄줄 읊으며 '당신 통장이 범죄에 쓰이고 있으니 돈을 인출해 금융위원회 직원에게 맡겨라'는 식이었다. 김씨가 수금해 보이스피싱 조직에 전달한 금액은 9000여만원이다. 김씨는 "나는 300여만원의 수익을 챙겼다"고 했다.

김씨는 보이스피싱 피해를 줄이려면 일단 총책이 조종하는 국내 '심부름꾼'들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국회 윤한홍 의원이 14일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작년 1~11월 붙잡힌 보이스피싱 사범 4만4918명 가운데 조직 총책·관리책은 1018명(2.3%)에 불과했다. 이들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김씨 같은 수금·인출·송금책이 9865명(22%)에 달했다. 나머지 3만3000여명은 계좌를 빌려준 단순 범행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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