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43] 페르시아와는 바다서 싸워야 승산… 육군도 노를 잡고 하나로 뭉쳤다

조선일보
  • 살라미스=송동훈 문명탐험가
입력 2020.01.15 03:13

[아테네가 페르시아 격파한 살라미스]
- 페르시아군 파죽지세로 진격
아테네인들 항복 거부하고 살라미스섬에서 결전 준비
- 테미스토클레스가 창설한 해군
마라톤 승리 뒤 재침공 예상… 해전으로 승부하려고 해군 키워
- 육군의 리더 키몬도 해전 지지
당파 이익 버리고 애국심 발휘… 두 리더가 힘 합쳤기에 승전
- 물살 거센 살라미스 해협
섬 건너는 아테네 외항 피레우스… 지금은 많은 상선·여객선 오고가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피레우스 항구는 아테네의 외항(外港)이다. 바다에서 아테네로 가려면 반드시 피레우스를 통해야 한다. 그 사실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오늘날도 매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선과 여객선이 이곳을 드나드는 이유다.

살라미스섬은 그런 피레우스 항구의 건너편에 있다. 섬과 항구 간 거리는 '지척(咫尺)'이란 표현이 딱 들어맞을 만큼 가깝다. 사람들 간 왕래도 빈번해서 거대한 페리가 종일 섬과 항구 사이를 오간다. 언제 가도 오래 기다리지 않고 섬으로 건너갈 수 있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을 맡으며,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살라미스로 건너가면 운치 있는 해안 풍광이 펼쳐진다. 그리스식의 진한 커피를 파는 가게와 다양한 해산물 요리를 제공하는 식당들. 거대한 문어를 오토바이에 싣고 달리는 청년들과 문어를 햇볕에 말리는 아주머니들…. 피레우스 항구와 달리 이곳은 평온하고 한가하다. 그러나 과거의 속살을 살짝 들춰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역사의 망루 높은 곳에 살라미스섬이 서 있었던 적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인 기원전 480년의 가을이었다.

테르모필레가 뚫렸다

그해 여름부터 살라미스섬은 소란스럽고 번잡했다. 페르시아군의 침공을 피해 온 아테네인들로 섬 전체가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대왕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은 역사 이래 그리스 세계가 본 적 없는 대규모였다. 육지에서 최강이라는 스파르타의 소수 정예도 천험의 요새 테르모필레를 3일 이상 지켜낼 수 없을 정도였다. 테르모필레를 통과한 페르시아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항복과 항전의 갈림길에서 아테네인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아테네를 떠났다. 그들은 바로 이 살라미스섬에서 페르시아군을 기다렸다. 이곳에서 아테네인들은 아테네와 그리스 문명 전체의 운명을 걸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이때 모두의 시선은 한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기원전 524?~460?). 아테네 해군의 건설자이며, 장차 다가올 전쟁을 이끌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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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섬의 승전 기념비는 2500년 전 이 앞 바다에서 역사적인 전투가 벌어졌음을 상기시켜주는 멋진 조형물이다. 그러나 아쉽다. 그날 승리의 진정한 주역은 배 위에서 창과 활을 들고 싸웠던 전사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배 안에서 쉴 새 없이 노를 저어야 했던 노잡이들, 번듯한 이름 하나 남기지 못했던 그들이야말로 승리의 원동력이었다. /서경석 사진작가
테미스토클레스는 탁월한 통찰력과 창의력의 소유자였다. 열정적이고 용감했으며 무엇보다 시민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탐욕과 기만의 일인자였다. 거액의 뇌물을 받아 챙기는 것으로 유명했고, 상대방을 매수해 일을 자기 뜻대로 이끌어가는 데도 능숙했다.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장점을 바탕으로 아테네 정계에서 착실하게 입지를 다지며 성장했다. 피레우스에 대규모 항만 시설을 건설함으로써 훗날 아테네 제국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도록 한 것도 그였다.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 참전했던 테미스토클레스는 온 아테네가 승리에 들떠 환호할 때, 홀로 고민에 빠졌다. 마라톤에서의 승리가 전쟁의 끝이 아니라, 거대한 전쟁의 서막에 불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존심에 상처 입고, 위신이 깎인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전력을 다해 다시 쳐들어올 터였다.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폴리스들이 그런 페르시아의 대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그는 답을 찾았다. 바다, 그리고 해군!

우리 모두는 함께 바다에서 싸운다

해군을 길러 바다에서 페르시아 대군의 보급로를 끊음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의 천재성이 빛나는 대목은 그다음이다. 그는 이번 기회에 아테네를 육지에 기반한 국가에서 바다를 근간으로 한 해양 국가로 완전히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해군을 건설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이때 행운이 찾아왔다. 아테네 남쪽의 라우리움 은광에서 어마어마한 광맥이 발견된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민회를 설득해 그 돈으로 해군을 건설했다. 전쟁 발발 직전 아테네는 고대 지중해 최강 전함이었던 삼단노선을 200척이나 보유한 해양 강국으로 거듭나 있었다. 이는 국가의 발전 방향이란 측면뿐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도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삼단노선에는 선원 200명이 승선하는데 그중 노잡이가 170명으로 압도적이었다. 결국 전함 200척을 유지하려면 노잡이만 3만4000명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는 아테네 시민을 총동원해야만 가능했고,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렇게 했다. 이제 나라를 지키는 일이 자신의 돈으로 중무장 보병의 무구를 장만할 수 있는 중산층에서 건강한 신체만 있으면 되는 모든 시민으로 확산된 것이다. 이로써 무산계급의 정치적 목소리가 커졌고, 아테네 민주주의의 참여 폭은 더욱 넓어졌다. 공동체의 결속력도 강해지면서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와 활력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살라미스 섬
그러나 막상 전쟁의 순간이 다가오자, 일부 보수적인 사람은 모든 시민이 노잡이가 되어 바다에서 싸우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아이디어에 반대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수백 년 동안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세계 군대의 주력은 중장보병이었다. 그들이 국방의 중추였고, 사회의 주류였다. 더욱이 아테네의 중장보병이 페르시아의 군대를 상대로 마라톤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게 불과 10년 전이었다. 마라톤 승리의 기억이 아직 생생한 중장보병들에게 싸워보지도 않고 무구(武具)를 내려놓고 배를 타라? 무리한 요구였다. 페르시아의 대군이 쳐들어오고 있는 상황에서 내분은 치명적이었다. 이때 키몬이 나섰다. 그는 마라톤 승전 장군인 밀티아데스의 아들로 중장보병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리더였다. 그런 키몬이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이번 전쟁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이런 문제 앞에서 당파의 이익이란 사소했다. 키몬 역시 중장보병으로 페르시아와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바다에서 싸워야만 승산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애국심과 전략적 통찰력을 공유한 두 리더, 키몬과 테미스토클레스의 신성동맹(神聖同盟)으로 아테네는 하나가 됐다.

아테네를 버려 아테네를 살렸다

그리고 아테네를 버리고 떠났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텅 빈 아테네를 발견한 크세르크세스는 아크로폴리스를 비롯한 아테네를 불태우고 약탈함으로써 화풀이를 했다. 그리 멀지 않은 살라미스섬에서 그 불길은 훤히 보였다. 아테네인들은 슬픔을 가슴에 담고 최후의 전투를 준비했다. 페르시아 군대도 결전을 벼르기는 마찬가지였다. 100만명이 넘는 대군을 이끈 대왕의 친정(親征)이었다. 고작 테르모필레에서 거둔 승리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대왕의 위신을 세워줄 결정적인 승리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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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섬에서 바라본 피레우스 항구 전경. 살라미스 전투 당시에는 사진의 오른쪽 끝부분만이 피레우스 항구로 페르시아의 전함들이 정박해 있었다. 전투 당일 항구와 섬의 뾰족한 부분이 만나는 좁은 해협으로 들어오던 페르시아 전함들은 기다리던 그리스 연합함대의 질풍 같은 공격을 받고 패주했다. /서경석 사진작가
테미스토클레스는 처음부터 살라미스 해협을 결전지로 찍어두고 있었다. 이곳은 물살이 거센 좁은 해협이었기 때문에 페르시아 함선의 수적 우위를 무산시킬 수 있었다. 해전은 기원전 480년 9월 25일 시작됐다. 아테네가 이끄는 그리스 연합함대는 368척, 페르시아 해군의 함대는 2배 이상이었다. 그러나 전투는 그리스의, 아니 아테네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더 정확하게는 일치단결해서 노를 저은 이름 없는 아테네 시민들의 승리였다. 페르시아 해군은 풍비박산 났다. 그리스 정복의 꿈도 깨졌다. 크세르크세스는 즉각 철군을 결정했다. 대왕은 살라미스에서의 패배가 더 큰 문제, 즉 보급의 단절과 이오니아(오늘날 터키 서해안)에서의 반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으로 그리스군은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 페르시아군이 모두 물러간 것은 이듬해 일이지만, 전쟁의 승패는 이미 살라미스 해전에서 결정됐다.

그로부터 2500년이 흘렀다. 오늘날 살라미스에 그날의 위대한 순간을 기억하는 건 승전기념비가 유일하다. 삼단노선 위에 올라 있는 두 남자. 그들은 함께 싸운 전우였고, 시민이었다. 그러나 나에겐 두 사람의 리더가 보인다. 테미스토클레스와 키몬. 그들이 배 위에 함께 서지 않았다면 아테네가 하나로 뭉칠 수 있었을까? 하나로 뭉치지 못했다면 아테네가 페르시아와 싸워 이길 수 있었을까? 이곳에서도 역사의 자명한 이치 중 하나를 깨닫게 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승전 이끈 테미스토클레스, 반역죄로 고발돼… 페르시아로 망명]

테미스토클레스가 페르시아로 간 까닭은?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해군의 아버지인 동시에 아테네 제국의 설계자였다. 아테네는 그에게 승리와 생존은 물론이고 미래도 빚졌다. 그러나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관대함이란 덕목을 갖추지 못했다. 시민들은 언제나 영웅에게 박했고, 작은 실패에도 분노했다. 살라미스 승전 이후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를 권력에서 배제시켰다. 급기야는 도편 추방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이 구한 도시를 떠나 펠로폰네소스의 아르고스란 폴리스에서 지냈다.

그의 기구한 운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테네의 반대파들은 그를 반역죄로 고발했고, 민회는 그를 소환했다. 자신의 운명은 이미 결정돼 있음을 느낀 테미스토클레스는 도망가는 쪽을 선택했다. 그는 아테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페르시아를 망명지로 선택했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페르시아의 대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살라미스에서 패배했던 크세르크세스의 아들)가 기꺼이 테미스토클레스를 받아들여 지방 총독으로 임명하고,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해줬다는 것이다. 아테네가 비록 페르시아를 이겼지만 최대 판도는 에게해에 불과했고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페르시아는 아테네에 졌지만 제국은 여전히 광활했고, 아테네보다 오랜 세월 제국을 유지했다. 왜일까? 테미스토클레스의 기구한 운명이 그 해답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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