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깨미역국으로 따끈하고 든든하게 시작하세요

조선일보
입력 2020.01.14 03:00 | 수정 2020.01.15 06:36

[관악산 길상사 정위 스님의 정월 밥상]
매화 비빔밥, 커피 빙설… 상상력 더한 사찰음식 선봬
"새해 음식은 일단 든든해야… 김치 파스타도 좋겠네요"
"남은 채소는 조림으로 활용… 자투리도 주인공이 됩니다"

기미년(1919년)생 어머니는 손끝이 여물고 정갈했다. 아흔 넘어서도 머리칼을 틀어올려 비녀를 질렀다. 사람들은 "한강 이남에 느그 어머니만큼 된장을 잘 끓이는 사람은 없다"고도 했다. 어머니는 작년 세상을 떠났으나 찻잔 하나에도 흰 무명천을 받쳐 냈던 모습은 선연하다. 서울 관악산 자락에 있는 사찰 길상사에서 기거하는 비구니 정위 스님은 "어려서 그 모습을 보고 자란 덕에 내가 살림을 겨우 하고 있으려나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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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멋을 안다고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가 서 있는 모든 곳이 멋스럽다. 찻잔과 그릇 정갈하게 놓인 주방, 손때 묻은 탁자와 나무 선반…. 정위 스님은 "그냥 자주 닦아줬을 뿐"이라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정위 스님 솜씨는 '겨우 하는' 것과 거리가 한참 멀다. 봄엔 매화꽃 뜯어 비빔밥 만들고, 한여름엔 갈아낸 얼음에 더치 커피 붓고 팥과 연유를 더해 커피 빙설을 만든다. 가을엔 김치·버섯 넣고 파스타를 하고, 한겨울엔 버섯 우린 물에 각종 채소 넣어 끓인 떡국을 곱게 차린다. 뻔한 사찰 음식이 아닌 상상력과 감각을 더한 '요즘 음식'이다.

스님이 최근 '정위 스님의 가벼운 밥상' 개정판을 냈다. 사시사철 요리뿐 아니라 상차림이나 집 꾸미기 같은 살림 비법이 담겼다. 길상사를 찾아가 스님에게 정월 초하루엔 무얼 먹으면 좋을지 물었다. 그는 가만히 대답했다. "새알심 넣은 들깨 미역국도 좋겠고, 씻은 김치 넣은 파스타도 좋겠네요." 입가에 찻물 같은 웃음이 걸렸다.

◇검소해도 누추하지 않게

"아유, 별것 없어요"라고 스님은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별것은 있다. 일단 손님이 오면 갓 내린 커피나 차를 아담한 찻사발(茶碗)에 담아 낸다. 과일도 인절미도 과자도 다완에 낸다. "떠먹기 좋고 고물이 흐트러져도 덜 지저분해 보여서 종종 쓰죠." 나뭇잎 무성한 계절에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 간직해둔 것을 골라 찻잔이나 다과상 옆에 올려 모양을 내기도 한다. 세심하고 다정한 그만의 첫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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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새알심을 넣고 끓인 들깨 미역국. 씻은 김치를 올린 들기름 파스타. 단호박 라테와 툭툭 찢어 담아낸 곡물빵.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브레드 출판사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는 정위 스님이 추구하는 삶과 닮은 말.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한 그릇을 차려도 보기 좋고 단정하게 내는 것이 몸에 배었다. 새알심 들깨 미역국을 고른 이유도 그렇다. "경북 사투리 중에 '골 메운다'는 말이 있어요. 먹고 뼈가 튼튼해진다는 소리인데, 들깨 미역국이야말로 골 메우기 좋거든요. 먹으면 몸이 뜨끈하고 든든해요."

물에 불린 미역을 들기름 넣고 볶으면서 간장을 조금씩 넣고 간을 한다. 표고버섯 우려낸 물을 조금씩 넣어가며 끓이다가 찬물을 붓고 우르르 끓이고 여기에 들깨즙을 양껏 넣어준다. "몇 그램 넣고 그런 건 몰라요(웃음). 갈아낸 들깨를 그대로 넣지 않는 것은 말끔해 보이지 않아서이고요. 들깨즙을 많이 넣을수록 구수하겠죠." 찹쌀가루로 빚은 새알심을 넣고 한 번 더 끓인다. 맑고 고소한 향이 가득 퍼졌다.

정위 스님표 파스타는 더욱 쉽고 독특하다. 표고버섯 썬 것을 들기름에 구워낸다. 들기름을 팬에 두르고 삶아낸 면을 넣고 휘휘 볶는다. 소금 후추 적당히 뿌려서 면을 돌돌 말아 접시에 담는다. 구운 표고버섯과 씻어서 곱게 채 썬 김치를 곁에 함께 담아주면 끝. 정위 스님은 "별식으로 먹으면 재밌죠"라고 했다.



최근 개정판을 새로 펴낸 '정위 스님의 가벼운 밥상' (브레드 출판사)
최근 개정판을 새로 펴낸 '정위 스님의 가벼운 밥상' (브레드 출판사)
◇자투리도 아껴서

재료 하나 남기지 않는 것은 스님의 오랜 습관. 떡국에 넣는 채소는 뿌리는 잘라내고 다듬어 쓰는데, 남은 표고버섯 기둥 같은 것은 조림으로 먹는다. 낡은 천, 버려진 조각 천을 모아다 자수를 놓아 냅킨이나 테이블 러너로도 쓴다. 떡국에 넣는 채소 고명은 넉넉히 만들었다가 비빔국수, 비빔밥, 스프링롤, 샌드위치 속재료로도 쓴다. 정위 스님은 "버리기 싫어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 내 방식이 생겼다"고 했다. "자투리도 아껴주면 주인공이 되지요. 세상 그렇지 않은 게 어디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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