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일각까지 독립 의지 밝혀라"… 창간 첫해부터 3·1운동 공판 중계

조선일보
  • 김성현 기자
    입력 2020.01.09 03:00

    [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3] 민족대표 공판 年中 보도
    "우리 조선의 독립이 목적… 4대 자유 없는 것이 민망"
    오화영·길선주·최남선 등의 법정 발언 그대로 실어

    민족대표의 서대문 감옥 생활, 방문기 형식으로 생생히 전해

    "내가 독립을 시키겠다는 마음은 없었으나, 우리 조선이 독립국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이 있었소."

    1920년 7월 16일 자 조선일보는 사회면 한 면을 다 털어서 3·1운동 관련 인사들의 공판 기사를 보도했다.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가한 오화영(1880~1960) 선생은 공판에서 3·1운동 직전의 회합 사실을 인정하면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조선일보는 '조선 독립을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이 발언을 그대로 전했다. 일제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공판 기록과 법정 진술을 보도하는 것은 민족 독립의 염원과 투쟁 정신을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이날 기사에는 '조선 독립운동의 수령(首領)/민족자결주의자 47인의 공판/제4일 심문 내용 필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3·1운동 민족 대표들의 첫 공판 다음 날인 1920년 7월 13일 자 조선일보.
    3·1운동 민족 대표들의 첫 공판 다음 날인 1920년 7월 13일 자 조선일보. 이날 사회면 상단과 하단에 공판 사진 2장을 나란히 실었다. /조선일보 DB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가한 길선주(1869~1935) 목사는 법정에서 "사람에게 네 가지 자유가 있어야 하겠는데, 즉 교육의 자유, 출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는 누구든지 가질 만한 것인데 그런 자유가 없어서 어찌 견디겠습니까. 마음에 민망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길 목사의 진술은 "인생은 4대 자유가 있는데 그것이 없어서 항상 민망하게 여기었다"는 제목으로 뽑았다.

    민족 대표들이 3·1운동 참가자들에게 당부한 일종의 행동 강령이 공약삼장(公約三章)이다. 이 가운데 '최후의 일인(一人)까지,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快)히 발표하라'는 2항이 폭력 선동에 해당한다는 추궁이 공판에서 쏟아졌다. 최남선(1890~1957)은 "조선 사람들은 누구든지 1인이라도 최후의 일각까지 반드시 품고 있는 독립하고자 하는 의사를 발표하라는 뜻"이라고 반박했다.

    1919년 3·1운동의 성과로 이듬해 창간한 조선일보는 3·1운동 공판 보도에 온 힘을 기울였다. 창간 첫해인 1920년 내내 3·1운동 기사가 지면을 장식했다. 1920년 6월 22일 자 사회면에는 3·1운동으로 투옥된 민족 대표자들의 서대문 감옥 생활을 방문기 형식으로 전했다. '오세창은 좌선으로 건강을 보지(保持)' '최린은 경미한 위장병으로 신음' '철창 속에서 자조론(自助論)을 저술하는 최남선'이라는 내용이었다.

    3·1 독립선언 서명자들에 대한 첫 공판은 1920년 7월 12일에 열렸다. 조선일보는 한 달 전인 6월 25일 자부터 공판 소식을 앞서 보도했다. '민족 자결 독립 선포의/손병희 외 48인/제1회 공판 오는 7월 12일/고등법원 신축 특별법정에서'라는 제목이었다. 첫 공판 다음 날인 7월 13일 자에는 '손병희 이하 48인/제1회 공판 개정(開廷)/어제 오전 8시에 정동 특별법정에/개정되어 사실을 심리했는데/방청석에는 150명의 근친과/관계자가 눈물을 머금고 있었더라'는 스케치 기사가 실렸다. 이날 사회면에는 상단과 하단에 공판 사진 두 장을 나란히 싣기도 했다.

    일제는 당시 3·1운동 민족 대표들이 법정으로 이동할 때 얼굴을 가리려고 용수를 씌웠다. 조선일보는 1920년 7월 15일 자 사회면 기사를 통해 이런 반(反)인권적 조치를 정면 비판했다. 사진 제목부터 '47인의 지긋지긋한 장식'이라고 달았다. 기사에서도 '죽음'과 '지옥'이라는 비유를 통해 혹독한 수감 생활에 지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사회면 대부분을 3·1운동 공판 기사로 채웠다.

    원로 언론학자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일제의 총칼에 피 흘리며 싸웠던 3·1운동의 저항과 희생을 통해서 탄생한 결과물이 민족지였다"며 "조선일보는 첫해부터 독립운동가들의 공판 기사를 전하면서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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