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도 나물도 '캔다'라고 하는 한국, 그 채집문화가 미래사회의 밑천

입력 2020.01.09 03:13

['시대의 지성' 이어령이 말하는 한국의 다음 100년] [2] 인공지능과 채집문화의 통섭
인류는 350만년간 수렵채집 생활… 신체·유전자 모두 그에 맞춰 진화
한 손엔 호미, 다른 손엔 스마트폰… 우리 모습이 다음 시대 연결고리

농업·바이오 등 생명분야 급부상… AI와 함께 사는 세상 곧 다가와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결처럼 과학기술과 동양 지혜 결합 중요

이어령(86) 전 문화부 장관이 생각하는 다음 100년 한국·한국인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앞서 한반도를 둘러싼 신(新)지정학을 강조한 이 전 장관은 최재천 조선일보100년포럼 위원을 만나 생명과 과학 분야를 주제로 미래 과제를 이야기했다.

대담 :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이어령(왼쪽) 전 문화부 장관이 경자년 새해를 앞두고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를 만나 한국 사회의 미래 키워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어령(왼쪽) 전 문화부 장관이 경자년 새해를 앞두고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를 만나 한국 사회의 미래 키워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다음 100년은 수백만 외국인,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 등과 조화롭게 공존해야 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다. /남강호 기자
이어령-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은 지 20년이 지났다. 2000년 첫날, 나는 새천년준비위원장으로 갓 태어난 '즈믄둥이'의 울음소리를 전 세계에 TV 생중계했다. 0.1초가 빠르거나 늦어도 안 되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이벤트가 가능했던 것은 세계에서 가장 앞선 한국의 통신 기술 덕분이었다.

농업시대 때 힘은 사람의 근력에서 나왔고, 산업화 시대 국가의 힘은 군사력과 경제력에 좌우됐다. 정보화 시대의 힘은 정보의 소통력과 클라우드의 빅데이터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데이터 시대 다음에 올 문명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생명력, 즈믄둥이가 태어나는 생명의 소리로 답한 것이다.

최재천-당시 즈믄둥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새로운 미래의 힘이 아기 울음소리에서 나온다는 것은 어떤 뜻이었나.

-"구슬이 바위에 떨어져도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즈믄해(1000년)를 홀로 살아도 사랑의 믿음이야 끊어지겠습니까"라고 노래한 고려가요(서경별곡)에서 찾은 말이다. 지난 천년과 앞으로 올 천년을 잇는 끈으로 찾아낸 것이 아이의 울음소리, 생명의 힘이다. '즈믄'이라는 사어(死語)를 복원해 첨단 기술과 접목한 것처럼 출산과 육아를 바이오필리아(biophilia·생명 사랑)의 새로운 문명 문제와 결합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에드워드 윌슨 전 하버드대 교수가 주장한 '통섭(consilience)' 개념과도 통한다. '함께 도약한다'는 뜻의 원어를 최재천 교수가 원효대사의 '화쟁' 사상에서 가져온 통섭이라는 말로 옮겨 세상에 널리 알린 것처럼, 나는 사방에 흩어진 지식과 문명의 구슬들을 하나의 끈으로 꿸 수 있는 게 생명을 사랑하는 힘, 우리 고유의 생명자본이라고 생각했다.

-생명을 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두 개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산업자본, 금융자본 같은 말에 익숙한 탓이다. 원래 자본(capital)은 머리(頭)에서 나온 말이다. 가축을 길러 새끼를 낳아 머릿수가 늘어나는 게 자본의 개념이다. 그런데 금덩이가 돼지나 양처럼 새끼 치는 것 봤나. 오히려 금융자본이 이상한 말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도 돈에 이자가 붙는 것을 부자연스러운 일로 생각했다. 자본을 우리말로 하면 밑천이다. 장사 밑천이라는 말처럼 자식 밑천이라고도 한다. 우리에겐 오래전부터 생명이 자본이라는 풍부한 의식과 경험이 있었다.

-한국에 생명자본이 풍부하다는 근거는?

-유발 하라리가 지적했듯이 생명을 지탱하는 인체나 인류 생활양식의 근본은 350만년 동안의 수렵 채집 시대에 이루어졌다. 농경시대에서 현재까지는 1만년도 안 된다. 신체 조건이나 유전자는 채집 시대에 적합하게 돼 있는데 사람들은 그 생명의 바탕을 망각하고 버렸다.

그런데 정보 문명의 최첨단을 달리면서도 채집 문화를 가장 많이 지닌 집단이 바로 한국인이다. 우리는 정보도 '캔다'라고 말하는데 호미로 나물 캐던 버릇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음식 문화의 본류도 나물 문화다. 일부러 뿌리를 키워 콩나물을 만들고 심지어 콩잎까지도 먹는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라는 청산별곡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온라인 세상에서 정보를 찾는 '디지털 노마드'는 유목(nomad) 문화의 유산 아닌가.

-정보를 유목 문화에 비유하는 것은 목축을 주로 한 서구인들의 착각이다. 채집민은 낯선 열매와 풀을 먹기 전 반드시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며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정보를 파악했다. 짐승들이 다니는 길, 어디를 가야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있는지 생사가 걸린 정보 수집 활동을 매일 해야만 했다. 이런 채집민과 재배한 곡식과 가축의 고기를 먹는 사람은 정보를 대하는 마인드가 같을 수 없다. 요즘 인터넷에서 호미(homi)와 포대기(podaegi)가 BTS(방탄소년단)처럼 인기다. 채집형 한국 문화가 한류(韓流)의 원천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 아닌가. 한 손에 호미를 들고, 다른 손에 최첨단 스마트폰을 든 한국인을 떠올리면 다가올 생명화 시대의 연결고리가 보인다.

-말씀대로라면 20년 전 생명화 시대를 예고했고, 그렇게 생명자본이 풍부한 한국이 지금은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가 돼버린 건 무슨 조화인가.

-작년 10월 처음으로 인구 자연증가율이 0%에 그쳤다. 이 추세라면 한국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저출산은 '민족의 자살'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이었지만, 그중 가장 빠르게 변화한 것이 출산 문화이다. 불과 한 세대 만에 거의 100%가 병원에서 아이를 낳는다. 그런데도 출생아 수가 줄어 산부인과가 문을 닫고, 분만대 없는 조산원이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서구에는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애를 낳지 않는 반출생주의(anti-natalism)가 있었다. 최근 인도에서는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를 낳았다며 부모를 고발한 사건이 생겼다. 국내에서도 아이들을 꾸짖으면 "누가 날 낳아달라고 했느냐"라고 항의한다. 서구의 반(反)출산 문화에 아무런 면역 없이 노출된 것을 한국의 저출산 원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낙타와 생활한 적이 없었기에 메르스 바이러스가 한국에 가져온 혼란을 생각하면 된다.

-저출산 문제에 관해 저도 15년 전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라는 책을 쓰며 경고했고, 우리 정부도 150조원 넘는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어도 뾰족한 해결책이 안 나오고 있다.

-우리 전통 출산 문화와 육아 양식을 발굴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에서 기회를 찾아야 한다. 인공 분만을 뜻하는 제왕절개의 어원은 '분리하다'이다. 어머니와 아이를 떼어놓는다는 뜻인데, 아이를 요람에서 키우거나 꽁꽁 묶어놓는 스와들(swaddle) 등이 서구식 육아법이다. 그런데 한국은 요람을 사용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나라이고, 포대기로 업어 기르니 '분리 불안' 같은 말이 없었던 민족이다. 게다가 우리 출산 문화에는 새 생명의 탄생을 돕고 AS(애프터서비스)까지 맡는 삼신할머니라는 '생명의 여신'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생명이 자본이다' 이후 아픈 몸을 무릅쓰고 집필 작업을 하는 책도 출산과 육아에 관한 것이다.

-생명화 시대는 현재 어느 단계까지 이른 것으로 보나?

-세상 문명은 바야흐로 모든 생명체가 하나로 이어지는 바이오필리아에 이르고 있다. 지구에 다양한 생명체가 지속해 온 것은 그 DNA 속에 서로 돕고 사랑하는 공감과 공유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투자 분야에서도 산업화 시대에 순위가 밀렸던 생명 관련 분야가 주목받을 것이다. 농업, 의료·복지, 교육, 엔터테인먼트, 공감 능력을 키우는 예술 분야이다. IT(정보기술)·BT(바이오기술)·NT(나노기술)가 AI(인공지능)와 같은 인지 기술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또한 기술 자체를 자연에서 직접 가져오는 생체 모방 기술(biomimetics)까지 부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산불이 나면 천적 없는 장소로 날아가 알을 낳는 비단벌레의 감각기관을 모방해 화재 경보 센서를 개발하는 식이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원활히 소통해야 진정한 학문적 통섭이 될 수 있다. 다음 100년 동안 우리가 서구적 합리주의와 고유 문화를 통섭할 수 있느냐도 중요할 것 같다.

-신라 최치원의 '접화군생(接化群生)'을 풀이하면 접속·액세스[接], 결합·변화[化], 다양성[群] 그리고 바이오[生]이다. 모든 생명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다음 100년 인류에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200만명을 넘어섰다. 여기에다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과 함께 살아야 할 날이 곧 온다.

-계몽 시대를 제대로 겪지 못한 것이 한국 사회의 여러 갈등의 원인이 아닐까.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가 다른 곳도 아닌 서울 광화문에서 바둑을 둔 것은 의미심장하다. 광화(光化)라는 글자를 영어로 표현하면 계몽(enlightenment)이다. '세상을 빛으로 변화하게 하는 문'이 광화문인데 우리는 '촛불' 집회만 떠올릴지 모른다. 정치적 구호로는 어둠의 시대를 밝힐 수 없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은 호모 사피엔스가 직립(直立)한 이후 문명사적 최대 이벤트라 할 수 있다. AI와 함께 앞으로 올 문명을 밝혀나가는 지력의 시대가 막을 연 것이다. 서양의 지식과 동양적 바둑의 지혜가 경합하며 통섭한 것이다.

-말씀을 들으니 우리가 지금의 위기 상황만 잘 견뎌낸다면 나중은 희망적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다.

-결론을 말하면 구슬은 한 알, 한 알 셀 수 있는 디지털, 그것을 꿰는 끈은 연속체인 아날로그이다. 이 둘을 통섭한 것이 '디지로그'이며, 즈믄해를 홀로 살아가도 그치지 않는 생명애(生命愛)이다. 이것이 앞으로 살아갈 한국과 인류의 화살표라고 생각한다.


[글 싣는 순서]

①한반도와 아시아의 신지정학
③내일은 없어도 모레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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