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사흘 전에 호출받은 총수들

입력 2020.01.06 03:13

김강한 산업1부 기자
김강한 산업1부 기자

"기업 총수를 불과 3일 전에 참석하라고 하는 게 말이 됩니까."

지난 2일 서울 중구 대한상의에서 열린 청와대 주최 신년인사회에서 만난 한 대기업 임원은 "청와대로부터 총수가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은 게 일주일도 안 된다"며 "시무식도 오후로 미루고, 갖가지 약속을 조정하느라 난리를 쳤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 등 4대 그룹 총수가 모두 참석했다. 이미 해외 출장 길에 올랐던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불참했다.

기업 경영자들의 일정은 보통 두세 달 전에 정해지고, 특히 1월 2일은 일정이 꽉 차는 대표적인 날이다. 물론 청와대가 긴급한 요청을 해올 수는 있겠지만 신년인사회가 갑자기 잡힐 성격의 행사가 아니다.

초청 과정도 그랬지만 행사 당일 청와대의 기업인 대접은 어이없는 수준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같은 테이블에 한 명도 앉지 못했고, 이호승 청와대 경제수석과 모두 한 테이블에 앉아 그냥 밥만 먹었다. 문재인 대통령과는 말 한마디 섞지 못했고, 손 한번 잡지 못했다. 한 기업 임원은 "기업인들을 그저 병풍처럼 앉혀 놓는 걸 보니 일반 가정에서도 손님 대접을 이렇게 하겠나 탄식이 나오더라"고 했다.

청와대는 굳이 총수들을 부르려 하면서 재계의 대통령 참석 요청에는 응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지난 3일 대한상의가 주최한 신년인사회에 참석하지 않아, 취임 후 3년 연속 가지 않았다. '경제계 신년인사회'는 1962년부터 대한상의가 주최하는 경제계 최대 행사로, 김대중·이명박 전 대통령은 5년 연속, 노무현 전 대통령은 4차례,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 전까지 매년 참석했다. 문 대통령이 앞으로 2년만 더 불참하면 재임 기간 '참석률 제로(0)'라는 최초 기록까지 세울 수 있다. 재계에서는 "3년 연속 불참까지는 예상 못 했는데 기업인들 말은 아예 듣기 싫다는 뜻 아닌지 무섭다"는 얘기가 나온다.

문 대통령의 일방통행식 행보 때문에 놀라고 당황한 기업은 재벌들만이 아니다. 청와대는 지난해 10월 한 IT(정보기술) 기업이 주최하는 행사에, 개막 1주일 전쯤 대통령 참석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IT 업계 관계자는 "원래 미래 기술 청사진을 공유하는 자리인데 갑자기 의전 준비를 하느라 기술이 주인공이 돼야 할 자리를 대통령에게 빼앗겨버린 것 같았다"고 말했다.

올해 청와대 주최 신년인사회 주제는 '확실한 변화 대한민국 2020'이었지만 재계에선 "대통령의 태도는 확실히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 나온다. 대통령이 신년인사회를 대한상의에서 열고, 총수들 불러모아 곰탕 한 그릇씩 준 것만으로 경제계와 소통을 잘 시작했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심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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